■ 비변사備邊司 1편
■ 비변사(備邊司) 1편
비변사는 원래 전쟁 등 비상시를 대비해 설치한 임시기구로 ‘국경 변방(邊)의 일에 대비(備)하는 기관(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에 의정부를 대신해 국무 수행 기능을 맡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면서 의정부를 제치고 사실상 조선의 최고 국가 의결기관이 되었다.
비변사의 유래는 성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종 때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의정부 정승 및 원상과 병조(兵曹) 이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경험자들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국경 방어 계획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라 하였다. 비변사 참여자는 대체로 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들이었다.
지변사재상을 설치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승들이 군무(軍務)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변사가 처음 설치된 성종 때에는 6조 직계제였기 때문에, 의정부에 소속된 정승이 군무에 참여하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경험 부족으로 재상이 군무에 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지변사재상이 필요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병조(兵曹)의 미약한 권위 때문이었다. 병조는 정승을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대처할 수가 없어 정승 급의 권위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군사적 전문성을 구비하면서 정승급의 권위를 가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을 두게 된 것이다.
1510년(중종 5년)에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1517년(중종 12년) 기존 임시 기구인 축성사(築城司)를 비변사(備邊司)로 고치고, 그동안 부정기적으로 활동해 온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 비변사라는 기구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어디까지나 임시기구였기 때문에 독립적인 청사(廳舍)가 없었다.
기존 병조(兵曹)의 하위 부서인 무선사(武選司), 승여사(乘輿司), 무비사(武備司) 3사 외에 임시로 설치된 하나의 사(司)로서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활동하였다. 이후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으로 상설 기구로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별도 전용청사를 마련하고 전속 관원이 임명되어 독립 관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비변사가 상설기구화 되면서 병조(兵曹)는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군무(軍務) 전반을 담당했던 병조 대신 비변사가 기존 역할인 변방(邊防)의 군무 외에도 전국의 군무를 모두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상설된 비변사가 관청 간 위계질서를 교란하고 군무 기능 중복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비변사 폐지론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 모든 논란을 잠재워 버렸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