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준과 동의보감 2편
■ 허준과 동의보감 2편
내의원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柳希春)의 문집이 유일하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副提學)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招致:초빙)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도 치료하게 되어 장안에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을 소개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허준 관련 전설과 민간전승,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하여 쓰여진 각종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그가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인 방목(榜目)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그래서 진위여부는 알 수가 없다.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御醫)로 선임되어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어 1578년 종4품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당시 의과의 초시와 복시를 1등으로 합격해서 얻을 수 있는 관직이 종8품이었다고 하니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의로서 안면신경마비인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에는 인빈 김씨 소생의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그러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와 의금부는 벼슬을 거둘 것을 상소했다.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관의 가자(加資: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또 위중한 병으로 생사가 위험했던 왕세자 광해군을 치료하는 데에도 성공해 선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1590년에는 왕자 광해군의 두창(痘瘡:천연두)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醫官)에게 당상관의 품계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해 주십시오."라고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