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3편
■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3편
정충신이 노비출신이었기에 대신들 중에는 그를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워낙 총명하여 중국어와 일본어도 능숙하여 명나라와 왜를 오가며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난 외교통이었다. 총애하던 권율의 사위가 되고 이항복과는 동서지간이 되었다. 권율의 세 사위는 신립, 이항복, 정충신이다. 권율장군의 인물 보는 안목은 참으로 뛰어난 것 같다.
청의 침략에 방비해야 한다는 정충신의 충고는 무시되고 다시 지방관직으로 밀려났다. 광해군 때는 그나마 후금(청)과의 관계에서 실리외교를 하자는 북인들이 집권하고 있었기에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중립외교관은 비판받지 않았지만,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서인정권에서는 탄압이 이어진 것이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지만,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을 떠났다. 결국 후금의 침략으로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부원수로 임명되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지만 중앙관리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정충신을 귀향 보내곤 했다. 청과 외교를 끊는 것은 전쟁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 이유이다.
청나라와의 소통 필요성을 주장하며 화의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다시 장연으로 옮겨졌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듬해 포도대장에 까지 올라 천민으로서는 최고의 성공을 이루어냈다. 뒤이어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다시 지방으로 보내졌으나,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대로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후금)를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斷交)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릴 때마다 인조가 보호해 주긴 했으나,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외교술과 정보탐색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정충신의 병이 심해지자 왕이 친히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치료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636년 5월 사망하였다. 선조는 내시로 하여금 호상(護喪: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내려 수의(禭衣)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주도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명하였다.
1685년(숙종 11년)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다. 충남 당진군 정미면에 거주하던 5세손 정세오(鄭世奧)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 위치인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로 옮겨지었다. 1969년에 진충사(振忠祠)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배향(配享:신주를 모심)하고 있다. 이곳에는 중요민속자료 36호로 지정된 유품 5점을 비롯해 그의 유품들을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해마다 양력 4월 25일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진충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6호로 지정받았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