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4편
■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4편
여러 야사를 보면 정충신 장군의 인간성도 알 수 있다. 어린 날 거둬주었던 권율을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학문으로 인도해준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중풍에 걸렸을 때는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돌봐줄 정도였다. 또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도 당쟁을 일삼는 대신들 때문에 그를 챙겨준 ‘장만’ 장군을 끝까지 보필하며 따라다니기도 했다. 은혜를 기억하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덕장(德璋)이라는 칭호까지 들을 정도로 인심을 얻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계서야담’에는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청구야담’과 ‘해동야서’에는 이괄의 난 때의 활약상이, ‘동야휘집’에는 모든 설화가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전해지고 있다. 문집에 《만운집》, 저서에 이항복이 귀양갈 때 정충신이 수행하며 당시의 상황을 일기로 기록한《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
또 한편, 성품이 청렴하여 비리(非理)라는 것을 몰랐기에 가난을 벗어나질 않았다. 심지어 충무공 정충신장군이 유배를 떠났을 때는 가족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는 부를 축척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전쟁에서는 지장(智將)으로 적진에서는 외교관으로 관리로서는 청렴함을 다했다. 정충신의 충언(忠言)대로 중립외교를 유지하고 북방의 군사를 신경 썼더라면 병자호란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운 좋게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이 아니고 노력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유능함과 영특함으로 신분이 상승될 수 있다는 좋은 모범 사례가 되었다.
정충신의 아버지 묘는 광주에 있으나, 그는 서산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그의 아들들에게 유택(幽宅:무덤)을 서산으로 해줄 것을 친히 당부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서산은 태어난 곳보다 부모가 묻힌 곳보다 더 귀한 끌림이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장군의 묘는 마힐산의 국사봉 중턱에 부인과 함께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평생을 몸과 마음을 다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충성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의 넋이 대요리 산기슭에서 아직도 이 나라를 걱정하며 있는 듯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