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 형무소 3편
■ 서대문 형무소 3편
대부분의 감옥은 옥문을 닫아놓았지만 몇 개는 열어놓아서, 3평 남짓한 옥내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유관순열사가 갇혀있던 지하 감옥은 유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옥은 3평에서 5평 정도로 운신의 폭이 있지만, 지하 감옥은 독방이라 그런지 한 평 남짓으로 매우 좁다. 갇혀있던 독립 운동가들의 옥고를 짐작하게 할 수 있을 만한 구조이다.
여성 미결수(재판이 끝나지 않아 법적 판결을 받지 않은 상태로 갇힌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를 가뒀던 구치감이 1916년 즈음 지어졌다가 1979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으며, 여성 독립항일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형을 집행했던 장소도 남아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1916년 즈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 1층 안에는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여닫히는 마루판과 교수형에 쓰는 줄, 가림막 뒤쪽에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가 있다. 마루판이 열리면서 그 위에 있던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는 구조이다. 마루판 아래의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했던 공간이다.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인 수구문이 있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에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는데, 원래 길이는 약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나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그리고 시신을 받아갈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당하고, 민족 스스로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며,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다.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지난날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었으면 한다.
독립, 민주, 역사, 문화 관련 시민단체들이 2014년 2월 23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교육장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 발족식 및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기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한국인 강제징용의 아픔이 담겨 있는 일본의 군함도가 과거 식민지 탄압을 은폐하고, 근대 일본의 발전만 부각하면서 한국 외교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각종 로비로 인해 결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도 일본의 과거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아우슈비츠처럼 서대문형무소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