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향杜香의 일편단심 3편
■ 두향(杜香)의 일편단심 3편
퇴계는 두향이를 만나 매화를 알면서 부터 매화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됐다. 퇴계는 매화에 관한 시를 평생 118수나 지었고, 매화(梅花) 시 로만 엮은 《매화시첩》이란 책도 냈다. 매화 시 가운데는 상당수가 매화를 그대(君, 公), 형(兄)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이 가운데 두향이를 염두에 두고 지은 시가 많다. 그만큼 두향은 퇴계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퇴계는 이른 봄 추운 달밤에 매화가 피는 모습을 보기 위해 특별한 의자를 고안하기도 했다. 의자 밑에 화로를 놓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화로의 온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불을 덮어 쓰고, 달밤에 얇은 잎을 파르르 떨며 봉우리를 터트리는 매화의 개화(開花)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곤 했다.
매화가 추위를 이기며 꽃을 피우느라고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퇴계의 눈에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아무리 어려워도 정절(貞節)을 팔지 않는 두향이의 모습이 겹쳐보였을 것이다. 퇴계는 두향이 준 매화분에서 가지를 꺾어 머무는 곳마다 옮겨 심었다. 서울 집에도 매화를 옮겨심기도 하고, 매화를 분재(盆栽)해서 방에 놓고 두향이를 보는 듯 바라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올 때는 매화를 상대로, ‘매화야 잘 있거라, 내 다녀오마.’ ‘염려 말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는 내용으로 문답시를 짓기도 했다.
60세 때에 도산서원이 준공되었는데, 그때도 두향이 준 매화가 옮겨 심어져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지금도 이 설중매(雪中梅)들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두향이처럼 청순한 기품과 고고한 정절을 뽐내며 만개하고 있다. 퇴계는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除授)했지만, 55세 이후엔 안동 토계에 내려와서, 마지못해 잠시 벼슬길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을 제외하고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퇴계와 두향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슴 아픈 일이다. 퇴계는 1570년(70세)에 안동에서 숨을 거둔다. 숨을 거두면서도 퇴계는 아들에게 “매형(梅兄)에게 물을 잘 주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으면서도 두향이를 잊지 못한 것이다. 퇴계의 부음(訃音)을 강선대 초막에서 들은 두향은 소복을 입고 안동까지 걸어가서 먼발치에서 장례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곤 걸음걸음 눈물을 흘리며 단양 강선대로 돌아왔다.
두향은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을 떠놓고 안동 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두향은 자기 입에 밥 한 술 떠 넣지 않았다. 곡기를 일절 끊고 자리에 누운 두향은 초막에서 혼자 굶어서 죽었다. 혹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죽거든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의 유언대로 강선대 아래에 묻어주었다. 그러나 충주댐이 생기면서 두향의 무덤이 물에 잠기게 되자 후에 강선대가 바라보이는 높은 곳으로 옮겼다. 지금은 배를 타고 건너야 두향의 무덤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두향은 죽어서 450여년이 지난 후에 그 절개를 제대로 칭송받고 있다. 단양군에서 매년 5월에 두향제를 올리며 두향을 추념하고 외로운 넋을 달래고 있다. 천원 짜리 지폐에는 퇴계의 초상(肖像)과 함께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산서원 위에 퇴계가 그토록 사랑한 매화 20여 송이가 활짝 피어 있다. 두향이와 퇴계의 사랑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는 듯 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