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3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3편
원래 군주(君主)의 정실부인이 받을 수 있는 작위는 후(后)뿐이고, 비(妃)와 빈(嬪)은 후궁 또는 제후의 부인이 받는 작위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전체적으로 조선시대만큼 내명부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서 후(后)와 비(妃)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동급으로 썼다. 또, 왕의 적처를 왕후라고 하고, 첩은 부인(夫人)이라고 하여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의 칭호를 주었다. 또한, 여러 명의 적처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태조 왕건의 경우도 신혜왕후 류씨(神惠王后 柳氏),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등의 적처를 동시에 두었다. 원 간섭기 이후부터 고려가 원의 제후국으로 격하되면서 모든 왕실 용어가 원나라보다 한 단계 낮게 격하되었고, 국왕의 정식 부인이라도 비(妃)로 격하되면서 원 간섭기가 끝난 후로도 여전히 ‘왕후’의 칭호를 되찾지 못했다.
조선 초기 세종 14년(1432)까지만 해도 고려의 관습대로 태종의 원경왕후 민씨를 ‘정비(靜妃)’ 라 부르는 것처럼 ‘〇비(妃)’가 호칭이었다. 그 이후부터 대한제국 수립 전까지 465년간은 ‘왕비’라 하였고, 대한제국에서는 ‘황후’라 했다. ‘〇비(妃)’에서 ‘왕비(王妃)’로 바뀐 이유는 조선은 일부일처제를 지향하여 정실부인 한명에게만 ‘왕비’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나머지 후궁들은 비(妃)나 빈(嬪)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왕비’는 조선의 전형적인 칭호라 할 수 있고, ‘왕후’는 왕비의 사후(死後) 추존된 호칭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자주적인 외교지위를 확보함으로써 황제국 군주에게만 주는 사후 \조/종\의 묘호를 준 것처럼, 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격상하여 추존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려하자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정실부인이 아니라 후궁이었으므로 왕후가 아니라 왕비로 추숭해야한다"고 주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생전에 왕비를 부르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사극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중전(中殿)’이다. 왕비가 거처하는 곳인 중궁전(中宮殿-교태전)에서 따온 말로, 중궁, 내전, 곤전, 곤궁 등도 사용되었으나 보통 ‘중전마마’로 불리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선의 국모를 칭할 때는 “〇〇왕비”가 아닌 “〇〇왕후”라 함이 옳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된 뒤의 고종황제의 부인은 명성왕후가 아니라 명성황후라 함이 올바른 호칭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중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입버릇처럼 ‘민비’라고 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다.
명성황후는 죽은 뒤에 추존되었고, 현직에서 살아생전 황후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순명효황후(순종 비) 한 사람뿐이다. 그것도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기 전 단 4년 남짓 정도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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