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3편
■ 효종 3편
효종은 차근차근 북벌을 준비하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을 뽑았다. 효종은 즉위 후에 김자점 등 친청파를 제거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 척화파를 등용했다. 특히 대군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불러들여 북벌 이념을 널리 전파할 북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맡겼다.
송시열은 효종이 왕자였을 때 그를 교육했기 때문에 임금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이론적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믿었던 송시열이지만 북벌정책에 관한 한 효종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후원자가 되지는 못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추종하는 성리학의 대의명분 때문에 북벌의 선두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조선은 실리보다는 더욱 낙후되고 경직된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효종은 많은 신하들이 청나라를 치는 데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신하들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약해진 조선의 힘으로는 이미 강대해진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청나라와 싸우느라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文物)을 받아들여 나라 살림을 일으키는 것이 바른 정치라고 여기는 분위기도 높아졌다. 북벌(北伐)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이 같은 생각을 알고 있는 효종은 자신의 뜻을 충실히 따라 줄 장수가 필요했다. 효종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함께 북벌을 이룰 장수로 발탁된 이는 이완이다.
이완은 관례적으로 공신이나 왕실의 친인척이 임명됐던 야전사령관인 훈련대장에 전격 발탁돼 현종 때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효종은 병자호란 때 참전 경험이 있고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보여준 이완의 능력과 친명반청적인 그의 성향이 북벌 추진에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완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이완은 효종의 북벌 정책을 실천한 거의 유일한 장수였으며, 자신이 죽으면 효종의 무덤 인근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하는 등 철저한 효종의 사람이었다. 실제로 현재 이완의 무덤은 효종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여주 영릉(寧陵) 인근에 조성돼 있다. 죽을 때까지 효종과 북벌의 뜻을 함께한 상징물인 셈이다.
효종은 훈련도감과 남한산성의 수비대인 수어청에 대한 군비 증강 사업과, 군량미 확보 등을 통해 북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인조가 청나라를 치기 위해 만들었던 어영청(御營廳)은 왕이 직접 거느리는 부대로, 효종의 북벌정책의 상징과도 같았으므로 이를 강화시켰다.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와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도 꾀했다.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騎兵)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00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1656년에는 남방 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전쟁을 치를 때 필요한 군량미도 여러 곳에 나누어 모아 두도록 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