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4편
■ 효종 4편
그런데 효종이 북벌을 준비한 지 십 년 동안 군사를 키우고 군량미를 모았지만, 정작 신하와 백성의 뜻이 하나로 모아지지는 않았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서 살림살이가 더 나빠진 백성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 중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는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의 힘은 점점 강해져 쉽게 청나라를 칠 기회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효종의 강력한 의지와는 달리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이 효종이 기대를 걸었던 인물들은 북벌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내수(內修)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북벌은 효종의 고독한 사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에서 토로한 내용이다. 그만큼 북벌을 뒷받침해주는 정치 세력이 부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북벌에 회의적이었던 점도 북벌 정책의 큰 걸림돌이었다.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북벌 준비를 위한 정부의 군비 증강과 재정 부담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훈련도감군은 모두가 월급을 받는 모병(募兵)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고,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는 하루 생활이 급급한 백성들에게는 명분이 약했다. 중국은 이미 명나라 잔존 세력이 거의 사라지고 청나라가 확고하게 중원의 지배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실록이나 효종이 대화를 나눴던 인물들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효종의 북벌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하자,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나무 방패는 갖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급박할 때에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라고 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찍이 들으니 명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병을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堡壘: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구축물)를 만들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효종실록: 효종7년 10월 4일》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