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주화파 최명길 3편

■ 주화파 최명길 3편

■ 주화파 최명길 3편

양 파의 갑론을박에 고민하던 인조는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왕실 사람들이 청군에 붙들려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했다. 최명길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항복 문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상헌은 득달같이 달려가 노기에 가득 찬 음성으로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자결하지는 못할망정, 이따위 글을 쓰고 있는 게요? 이런 더러운 글을 쓰려고 공부를 했단 말이오? 어디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장이나 한번 읽어 봅시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쓰고 있던 편지를 빼앗아 읽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김상헌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명길은 찢어진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리자 그것을 주우며 말했다.

“대감은 찢으시오, 줍는 일은 내가 하오리다.”

최명길의 이 말에는 대단히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당시 조선을 이끌던 핵심 세력인 사대부들은 대부분이 명분에 얽매여 죽을 때 죽더라도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의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의 지속은 백성들만 도탄에 빠뜨릴 뿐, 실익(實益)이 전혀 없는 무모한 도전이다. 그는 굴욕적일망정 화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또한 성리학자였으니 당연히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최명길은 김상헌의 분노를 십분 이해했기에 본인이 쓴 편지를 찢어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자기라도 항복 문서를 써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굴욕을 무릅쓰고 편지를 완성해 전쟁을 중단시키고자 하였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亂國)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척화파들은 칼을 들이대고 면전에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인조는 척화파(斥和派)를 누르고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장유 등을 감쌌다. 이런 분란 속에서 최명길은 눈물을 흘리며 항복문서를 써야 했다.

존명(尊明)의 의리(義理)를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과 존명(尊明)의 의리(義理)를 잠시 접고 살길을 찾아보자는 자들, 어느 쪽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이었을까? 끝까지 목숨을 걸고 본질을 굽히지 않는 것이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면,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방법을 바꾸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권도(權道)’이다. 최명길의 타협적 노선도 권도였다. 치욕의 항복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끝났다. 어렵게 난이 끝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김상헌·홍익한 등 척화파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