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화파 최명길 4편
■ 주화파 최명길 4편
인조는 난국을 수습하라는 뜻으로 최명길을 정승의 반열에 올리고 1637년 영의정을 맡겼다. 그는 인질로 끌려간 척화대신과 포로들의 석방을 교섭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독보라는 승려를 명나라에 보내 그쪽 정세를 살피게 했고, 쫓겨 온 명나라 군대를 도와주었다. 그는 최고의 관직에 있으면서 동분서주하며 전란의 뒷수습을 도맡았다. 이러한 최명길의 이중적인 계책은 청나라가 보낸 첩자에 의해 모두 발각되고 말았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의 동정을 환하게 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명길은 1642년 청나라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가 김상헌이 갇혀 있는 감옥 옆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2년 동안 모진 고초를 겪은 끝에 김상헌과 함께 풀려났다. 청나라는 그들이 풀려날 때에 청나라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끝내 절을 안 했지만 최명길은 서슴없이 절을 했다. 그는 형식 따위에는 구애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철학은 바로 양명학(陽明學)을 수양한 데서 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선양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현직(現職)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저술에 몰두하며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시국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그가 오랑캐와 손을 잡았고, 명나라를 향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주화파인 최명길이 비난받는 것과는 달리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는 우러름을 받았다. 김상헌 일파는 이념 논쟁보다는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최명길은 외로운 처지였다. 그와 늘 뜻을 같이하던 명문장가 장유는 그를 알아주었지만, 이미 죽고 없었기에 최명길은 더욱 외로운 만년(晩年)을 보냈다. 최명길은 광해군을 몰아내는 대열에 섰지만, 실리와 타협을 추구한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충실히 계승한 외교가였다. 그리고 외침에 적절히 대응하는 외교전통을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란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담긴 그의 시문집 《지천집》은 다행히도 온전히 남아 있다.
척화파와 주화파,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감히 한마디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침(外侵)을 당하면서도 명분만을 중요시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요, 국력을 기르지 않고 기개만을 떠들어 보아야 나라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최명길이 택한 굴욕은 실리 외교 때문이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볼모로 잡혀갔던 이국 심양 땅에서 극적으로 화해한다. 두 사람 모두 종묘와 사직을 구할 일념으로 충성을 다했다는 본심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 즉 먼저 싸운 뒤 나중에 화의를 하자는 김상헌이나,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 우선 화의를 해 위기를 넘기고 나중에 싸우자는 최명길은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목표는 같은 셈이었다. 야사(野史)에는 김상헌이 자손들에게 최명길의 집과 의좋게 지낼 것을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김상헌의 후손들은 노론으로 정권 핵심 세력이 되었고, 최명길의 후손들은 양명학의 계통을 이어 소론으로 권력의 중심에서는 점차 멀어지며 대립했다.
60세가 되던 인조 23년 2월에 세자와 대군과 함께 청에서 귀환한 뒤 청주로 돌아와 진천에 머물렀다. 62세로 세상을 떠난 뒤 대율리 선영에 장사지냈다. 숙종7년(1681)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大栗里), 속칭 댓뱀이라는 마을에는 전주 최씨의 대표적 인물인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종택이 있다. 이곳은 본래 최명길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선영에 성묘한 뒤 산 하나 너머의 와룡천변에 초가 한 채를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이 종택과 가까운 곳에는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