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3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3편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민중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인심을 얻을 수 있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민중이 바라는 정치를 해줄 수 있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화 공주와 혼인해 진평왕의 사위가 됨으로써 신라와 더는 충돌하거나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백제 사람의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무왕은 사실 힘없는 왕족이었다.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다 죽고 난 이후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들의 권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의 뒤를 이은 법왕이 즉위 1년 만에 후손없이 죽자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무왕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의 힘을 키우기에 힘썼다. 선화 공주와 결혼하여 신라와도 다시 가깝게 지내고, 수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격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무리하게 고구려를 공격하다 나라의 힘을 잃어 망하고, 신라는 등을 돌려 적이 되면서 백제는 또 다시 어지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왕은 백제를 다시 한번 일으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게 되었다고 하는 미륵사는 삼탑 삼금당으로, 중앙에는 목탑을 두고 동서로 석탑을 세운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중앙의 목탑과 서탑은 없어지고 허물어져 버렸고, 동탑만이 일제에 의해 콘크리트로 보강된 채 남아 있었다. 1998년 해체 복원 결정 이후, 185톤이나 되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떼어내고 해체 복원하는데 13년의 시간과 140억 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엄청난 일이었다.
학계의 논쟁이 가장 뜨거워졌던 것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이다. 2009년 1월 서탑 해체 시 주기둥 안에서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사리호 안에는 사리병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하고 꺼내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리병 안에는 진신사리가 보관 되어 있었다.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의 크기의 판에 앞뒤로 붉게 칠한 193문자로 미륵사의 창건 내력을 적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과 함께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사택은 백제 8대 성의 하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였으며, 미륵사지도 선화공주를 위해 무왕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내용대로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관직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경을 초월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결국 허구가 되는 셈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