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 3편
■ 행주대첩 3편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권율이 능력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다시 기용해 전라도 광주 목사에 임명하였다.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가 함락되고, 국내 사정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권율도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군병을 모집하였다. 방어사 곽영(郭嶸)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함께 북진해 6월 5일 용인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 참가했다.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이 첫 전투의 결과는 참패였다.
용인전투 당시 도순찰사 이광이 수원과 용인으로 들어가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일본군들을 기습공격하려 하자, 권율은 용인은 은신할 곳이 없는 평지인데다가 당시 훈련 상태나 병력의 수로 봐서 조선군이 절대적 열세라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면서 차선책을 내세웠으나, 이광이 그의 제안을 듣지 않고 공격령을 내려 2000명도 안 되는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선봉장 이시지(李詩之), 백광언(白光彦) 등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군사가 전멸되었다. 이때도 권율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상당수 유지할 수 있었다. 권율은 남은 군사들을 추스려서 광주로 퇴각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추가로 모집하면서 뒷일을 도모하였다.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이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 하자, 이들이 올라올 길목을 막기 위해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전주 이치(梨峙:배고개)에 진을 쳤다. 이치전투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대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좌절시켰다.
왜군은 이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율은 이 공으로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권율은 때마침 명나라에서 지원군이 추가로 5만 명 정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과 합세해 한양을 탈환할 목적으로 1592년(선조 25년) 12월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랐다.
앞서 용인전투에서 참패한 것을 기억하며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경기도에 도착한 뒤 수원 독산(禿山:오산시)의 독왕산성(禿旺山城:독성산성)에 들어가 잠시 병사들을 휴식시키며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군 병력 1만 여명이 수원 근처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의 연락과 군량미 등의 통로가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본군을 오산 등 여러 곳에 병력을 분산시켜 진을 치게 하고, 서로 오가게 하면서 독왕산성의 아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권율은 성책을 튼튼히 해 일본군의 상륙을 막고, 병력을 나눠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하며 신속하게 일본군의 진군을 막았다. 이러한 수성(守成)작전은 권율이 1593년(선조 26년) 2월 행주산성으로 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권율은 일본군을 한양에 묶어두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얻어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