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 4편
■ 행주대첩 4편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는데, 왜군은 이 사실을 알고 독왕산성에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한 달간 성을 포위하면서 지구전을 펼쳤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권율은 독왕산성에 물이 귀한 것을 감추기 위해 쌀로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했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왜장(倭將) 우키타는 성내(城內)에 물이 풍부하여 말을 씻기는 것으로 알고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한성으로 후퇴하였으며, 이때 권율은 일본군의 퇴각로를 알아내 정예 기병 1천명을 먼저 매복시켜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권율의 병사들은 나머지 왜군도 추격하여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권율에게 어검(御劍)을 하사하여 군률(軍律)을 세울 수 있게 권위를 부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兵法)을 높이 치하하면서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 1호선 역 중 하나인 ‘세마(洗馬)역’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세마(洗馬)라는 말 자체가 말을 씻는다는 뜻으로 독왕산성은 세마역 근처에 있다.
",권율이 수원을 지키는 동안, 개전 이래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했던 일본군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에서 개성으로, 또 개성에서 한양으로 퇴각을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그 뒤 명나라에서 지원군 선발대가 도착하자 권율은 이들과 합세하여 한양도성 탈환을 준비했다.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권율은 일본군 눈을 피해 수원 독왕산성으로부터 한성부 근처 서쪽 가까이로 병력을 옮기기로 한다. 그는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한성부 서쪽 주변에 물과 식량, 교통이 원활하면서도 매복이 가능한 곳을 물색하도록 했고, 조경은 행주를 후보지로 지목했다.
권율은 곧 병력을 비밀리에 행주로 이동시킨다. 조경에게 명하여 행주산성에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바로 이동령을 내려 독왕산성으로부터 군사를 건너가게 했다. 이동행렬이 왜군에게 포착되지 않게 하려고 독왕산성에 목책과 소수의 군사를 남겨, 많은 군사가 아직 계속 남아 있는 것처럼 위장시킨 뒤 군사를 신속하게 행주산성으로 이동시켰다. 그 중 3천여 명의 정예부대를 권율이 이끌고 마지막에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적들이 포착하게 함으로서 왜군은 행주산성의 병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왜군은 이치전투와 독왕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아침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휘 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행주산성의 뒤쪽은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도 없는 상황이어서 조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조선 군사들은 왜군이 성 쪽으로 접근하길 기다렸다가, 화차(火車)와 수차석포(水車石砲),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총통 등을 일제히 발사해 왜군의 성내 진입을 차단했다. 특히 왜군은 산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고 총탄을 쏘아야 했기 때문에 고전(苦戰)했지만, 조선 군사들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활을 집중적으로 퍼부어 왜군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