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철과 강아의 사랑 3편
■ 정철과 강아의 사랑 3편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 반려자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고, 예술적 호흡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강아는 항상 정철의 곁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기쁨을 주었다. 정철은 강아와 시를 나누고 그녀의 문학에 대한 조예와 아름다움에 반했다. 이들이 적소에서 나눈 사랑에는 단순한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만이 아닌 예술인의 깊고 깊은 교분이 존재했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에게 서신을 보낼 때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부인의 서신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투기나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불우한 자기 남편의 생활 속에서 위로해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워했다. 강아도 역시나 정철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정철을 더욱 알뜰하게 보살폈다. 정철과 강아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한양으로 불렀다. 정철은 유배지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함께 그동안 같이 한 강아와의 아쉬운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정철을 떠나보내면서 강아는 그녀의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을 하는 사람이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밤을 그대는 어디에서 자오.
나그네 창가에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정철 부인 안씨는 남편에게 강아와 한양으로 함께 오기를 권했지만 강아는 거절 했으며, 혼자서 강계에 살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충청도의 도제찰사로 임명된 정철을 찾아 강아는 다시 홀홀단신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혔다. 자신의 몸을 조국에 바치기로 결심한 강아는 적장(敵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유혹해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에는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 탈환의 숨은 공을 세웠다. 그 이후 강아는 이제는 정철을 다시 모실 수 없는 몸이 되었음을 슬퍼하며 ‘소심보살’ 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入山修道)했다. 선조 26년 12월 18일 정철이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으로 몸부림치다가 정철의 묘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를 찾아 시묘(侍墓)생활을 했다.
남은 생애를 송강의 모함을 풀고 신원을 복위시키려 온 힘을 쏟았던 강아는 결국 그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나중에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었으나, 강아의 묘는 그대로 정철의 처음 묘가 있던 송강마을에 남아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 정철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있어 정철과 강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무덤 앞에 있는 묘비 전면에는 ‘의기강아묘(義妓江娥墓)’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정철과 강아의 사랑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의 묘는 정철 후손들이 오백년을 이어 오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아와 정철의 세월을 초월한 사랑은 후세들에게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