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 일과 사람에 지쳤을 때 봐두면 좋은 영화...

◇ 일과 사람에 지쳤을 때 봐두면 좋은 영화...

◇ 일과 사람에 지쳤을 때 봐두면 좋은 영화...

일과 사람에 지칠 때마다 영화 ‘그래비티’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본다. 중력을 벗어난 샌드라 불럭에게 조지 클루니가 묻는다. “우주에 오니까 제일 좋은 게 뭐야?” “고요함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하던 주인공은 지구에서 영원히 멀어질 위기에 처하자 필사적인 노력으로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중력의 무게 속에서 한 걸음씩 걷는다. 이 두 장면을 보면 이상하게 다시 일하고 싶어진다. 내가 몸담은 세계의 중력 속으로 다시 걸어가고 싶은 용기가 생겨난다.

소설가 김훈의 글을 읽고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라면을 자주 먹는 이유는 라면이 정서의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라면을 처음 먹었던 그 최초의 정서로 돌아가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고. ‘그래비티’의 첫 장면을 보는 일은 나에게 일종의 산책과도 같다. 정신없이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잃어버린 마음속으로 걸어가는 ‘정서 산책’. 집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많아지면서, 나는 예전보다 더 자주 정서 산책을 나간다. 넷플릭스와 왓챠의 회원이 되면서 산책은 더 수월해졌다. 시공간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며 정서의 이곳저곳으로 순간이동한다.

글이 안 써져서 힘들면 박찬옥 감독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과 박해일의 술집 장면을 산책한다. “편집장님도 글 잘 쓰실 것 같은데 왜 작가가 안 되셨어요.” “난 글렀어. 작가는 원한이 있어야 돼. 자기 상처. 근데 난 너무 순탄하게 자랐어.” (그래, 순탄하지 말자.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오히려 고마워하자.)

새로 시도하는 작품이 불안하면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만년 꼴찌팀 이야기 ‘머니볼’의 마지막 장면을 산책한다. “제러미는 아시다시피 2루로 뛰는 걸 겁내죠. 강속구를 멋지게 받아친 후에도 악몽처럼 1루에 머물러요. 모두가 그를 비웃을 거라 생각했죠. 잠시 후 제러미는 알게 돼요. 사실은 그가 홈런을 쳤다는 걸.” “어떻게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래, 공은 이미 날아갔어. 남은 일은 달리는 것뿐이야.)

미처 하지 못한 말 때문에 집에서 끙끙 앓는 날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의 주인공이 바람에 날아가는 편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우는 장면을 산책한다. (그래, 이미 날아간 말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어.) 언제 올지 모르는 생의 마지막이 두려우면 이영애·유지태 주연의 ‘봄날은 간다’에서 고운 한복에 양산을 쓴 채, 삶의 마지막 길을 유유히 걸어가던 할머니의 뒷모습을 산책한다. (그래, 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산책인 거야.) 멋지게 나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시네마천국’에서 어른이 된 토토에게 존중의 태도를 취하던 옛 극장주의 모습을 산책한다. “왜 저를 어려워하세요? 제 사장님이셨잖아요.”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해야 하니까요.” (그래, 사랑하는 이들의 성취를 마구마구 칭찬해주자.)

내가 몸담은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바뀌지만, 영화 속 그 장면은 언제나 그 시간과 공간에 머물러있다. 내 몸이 끝없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내 정신이 한없이 무언가로 복잡해질 때마다, 언제든 1분간의 산책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최근에는 ‘OTT 산책 클럽’이라는 모임을 떠올려봤다. 영화를 보는 모임이 아닌, 영화를 산책하는 모임. 영화를 끝까지 보고,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공유하고(저는 ‘그래비티’의 8:28~8:37을 통해 중력과 고요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 장면을 통해 떠오르는 자신의 정서를 이야기하는 모임.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도, 서로의 몸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시기에, 만날 수 없으면 화상 앱을 통해서라도, 이 화상 앱에 모이기도 힘들면 단톡방을 통해서라도, 서로의 정서를 단 1분이라도 산책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몸이 떨어져도 우리의 마음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숨이 붙어있는 한 싸워야 해. 그러니 숨 쉬어. 계속 숨 쉬어.” –영화 ‘레버넌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