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과 과거제도 3편
■ 교육과 과거제도 3편
과거는 3년마다 보이는 정기시험과 필요에 따라 보이는 부정기시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의 명륜당 앞뜰에서 보이는 알성시(謁聖試)와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보이는 전시(殿試)가 대표적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교육기능과 함께 공자와 그 제자들을 받드는 기능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 안에 명륜당을 지어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금들은 자주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치렀다. 임금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를 성인 공자 앞에서 시험을 치른다 하여 알성시라고 불렀다. 알성시는 문과·무과 응시생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시험은 한 번으로 합격자를 뽑았고 한 과목만 보았으므로 시험 본 날 합격자를 발표했다. 또 고시 시간도 초 한 자루가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내게 한다하여 촉각시(燭刻試)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탓으로 간단하게 채점할 수 있는 문제를 냈다. 조선 후기에는 알성시가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응시생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적게는 몇 천 명, 많게는 2만여 명이 몰려왔다. 그야말로 장터나 다름없었다.
창경궁 안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을 춘당대(春塘臺)라 부른다. 춘당대 주변에는 너른 공간이 있고, 임금과 비빈(妃嬪)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전기부터 춘당대시의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보았다. 또 왕궁의 뜰에서 보인다 하여 정시(庭試)라고도 했다. 춘당대시는 정기시험이 아니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특별 시험이었다. 그리고 문과의 경우, 여러 단계를 두지 않고 한 번의 시험으로 끝냈다. 무과의 경우, 복시(두 번째 시험)만을 보았다. 문과는 합격자를 5명 정도, 무과는 합격자를 몇 십 명 단위로 뽑았다. 합격자는 당일 발표했다. 그 횟수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20회 정도였다. 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관들이 시관을 맡았다. 그러므로 질서도 잡혔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응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며 다른 과거 합격자들보다 자부심을 가졌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1만4600여 명으로 연평균 30여 명에 그쳤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뽑은 생원·진사시 합격자도 4만7000여 명에 그쳐 한 해 평균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생원·진사는 아주 흔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전국에서 매년 100등 안에 드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만 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관료의 길이 보장되는 문과가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별히 이이(李珥)처럼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하여 아홉 번 장원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이도 스물아홉 살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할 때까지 연이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이에게도 과거급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는 과거를 ‘고난의 가시밭길’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