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김자점 3편
■ 간신 김자점 3편
병자호란 이후 김자점은 도원수로서의 전략적 실수를 범한 죄로 유배를 가고 죽을 위기에 몰렸지만, 인조는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권위를 잃은 인조에겐 김자점간은 충복(忠僕)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자점은 아니나 다를까 재빠르게 친청파(親淸派)로 변신해 조정 중신들을 제압했고, 그가 후원하는 소용 조씨도 인조의 안방을 차지하면서 인조의 최측근이 되었다.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를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삼으며 김자점의 권력은 더 강화됐지만, 아울러 백성들의 지탄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김자점은 백성들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다가 가까스로 조정에 복귀한 만큼 김자점은 최명길을 비롯한 정적들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암중모색(暗中摸索)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이후 김자점의 벼슬길이 쭉쭉 열리게 된다. 1642년(인조 20년)에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우의정과 어영청도제조 등을 역임하고 청나라에 진사사(陳謝使) 겸 사은사(謝恩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청나라를 다녀 온 김자점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것이 현실인 이상 조선도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청을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이 점에서 김자점의 현실적 외교 안목에 대해서는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시국관(時局觀)은 훗날 그를 반역자로 지칭(指稱)하고 오늘날까지도 조선 최대의 간신으로 낙인찍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자점이 다소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어디에도 김자점에 대해 좋은 점을 기록한 문서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야사에 김자점이 조선에 온돌을 장려하고 확대 배급했다는 언급이 있다. 그것도 김자점의 온돌배급정책 때문에 산림이 크게 훼손되었다며 김자점을 비난하는 글이었다.
1644년(인조 22년) 김자점과 같은 반정공신으로 좌의정 겸 남한산성 수어사였던 심기원의 모반사건이 터져 조정이 분란에 휩싸였다. 심기원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워 요직에 임명되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소환되어 고문으로 악형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김자점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항간에 그가 역모를 조작했다는 풍문이 자자했다.
소현세자의 죽음(1645), 세자빈 강씨의 사사(1646), 임경업의 주살(1646) 등 의혹 짙은 사건이 이어지자 김자점에 대한 여론도 악화되었다. 특히 김자점에게 명장 임경업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민심은 ‘군사력을 키워 청에게 복수하자’던 명장 임경업에게 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