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간신 김자점 2편

■ 간신 김자점 2편

■ 간신 김자점 2편

김자점은 선조 때 문벌을 배경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를 통해 병조좌랑이 되었다. 병조좌랑은 정6품으로 군사에 관한 일과 무관 선발의 직무를 담당하는 요직 중 요직이었다. 음서출신이 이런 요직을 맡기는 힘든 일이었는데, 김자점이 맡은 것을 보니 당시 왕이나 조정대신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으며, 완벽주의자로 일처리가 엄하고 급했으므로 부하직원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했다.』 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아 무능은 했을지 모르지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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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던 김자점은 광해군 시절 대북파가 주도한 계축옥사 때 동료 서인들과 함께 대북파의 조치에 반발했다가 조정에서 쫓겨났다. 쫒겨난 서인들은 대북파의 탄압이 더 가중되자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친금배명 정책을 하는 광해군을 내쳐야한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자점은 서인의 핵심 요인이었던 최명길, 심기원과 함께 사돈인 이귀까지 포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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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623년(광해군 15년) 김자점은 공조 정랑으로 복귀했는데, 항간에는 그와 이귀가 인목대비(영창대군의 母)를 내세우고 역모를 꾸민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 무렵 광해군은 역모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정사(政事)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김자점은 자기의 제수씨(이귀의 며느리)를 통해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개시에게 접근하게 하고 김개시에게 뇌물공세를 펼침으로써 역모 소문을 잠재웠다.

운명의 3월 13일, 김자점은 수하들을 이끌고 홍제원에 나아가 이괄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세검정에서 평산 부사 이귀, 효성령별장 김류, 최명길 등과 연합하여 궁궐로 진격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다. 인조반정 직후 김자점은 당시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호조 좌랑을 거쳐 그해 9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별 승진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반정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1등 정사공신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년) 김자점이 승지로 임명되고 나서 얼마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린 인조가 공주로 도망칠 때 김자점은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護從)했다가 장만과 임경업의 활약으로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한양으로 되돌아와 인조가 세자빈으로 윤의립의 딸을 물망에 올리자 이에 반대를 하다가 실각의 위기에 처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이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강화도로 인조를 호송한 공로로 순검사(巡檢使)를 거쳐 임진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자점은 승승장구하여 1630년에는 한성부 판윤에 상의원 제조 겸 구관청 당상에 임명되었다.

1633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계속되는 청의 군사적 위협 속에 도원수(都元帥)에 올라 군부를 책임지고 있던 김자점은 여러 번의 전략적 실수를 한다. 정예병을 큰 길에서 벗어난 산성에 주둔시키는 전략을 택한 결과 병자호란 때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피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로로 진격해 한양을 점령했다. 심지어 김자점 본인도 황해도 토산에 정병(正兵)을 주둔해 놓고 교전을 피하고 있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