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성왕 3편
■ 백제 성왕 3편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 창(昌)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성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창(昌)이 신라를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聖王)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매복하고 있던 신라의 고도(苦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고,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성왕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군사를 잃을 정도로 대패(大敗)를 당했다.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강력하게 추진되어온 왕권강화와 이를 통한 백제의 중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되었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적이었던 고구려와 새롭게 손을 맞잡고 공동으로 신라에 대항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어렵게나마 확립되어 가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다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귀족들이 다 뜯어말린 전쟁임에도 성왕 본인과 태자가 강행했다가 왕은 전사하고 무려 3만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어마어마한 피해가 누적되었으니 왕권의 추락은 불가피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