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삼국시대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가공된 설화일까.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숱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전북 익산의 ‘쌍릉’(사적 87호)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 등이 확인되면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실화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관심을 끌고 있다.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미륵사지 발굴조사나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보수 과정 등에서도 선화공주와 무왕의 관계를 밝혀줄 유구(遺構), 유물(遺物)들이 확인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유물이나 유구의 해석을 놓고도 학자들의 견해는 다시 엇갈려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일연이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부여의 남쪽 어느 마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궁남지)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 연못에서 커다란 용이 나왔다. 용은 여인이 자는 방에 들어와 입에 물고 있던 커다란 여의주(如意珠)를 뱉어 놓았다. 여인은 갑자기 용이 나타나자 매우 놀랐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떨어지는 여의주를 치마로 받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로부터 열 달 후, 여인은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름은 장이다. 이것은 당시 위덕왕이 과부로 홀로 지내고 있던 여인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은 이야기를 설화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정실소생의 적자가 아니고 어머니는 미천한 과부 출신이므로, 이는 무왕의 최대 약점인 동시에 또한 극복 요소였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똑똑했던 이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마를 팔아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마를 파는 아이’라는 의미로 마동(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으로,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삼국시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이루어 냈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장애요소를 극복하고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마침내 이루어내어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된 것이다.
신라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다. “신라의 왕이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비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노라.”라고 말할 정도로 둘째 딸인 선화공주를 특히 이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에서는 대대로 박·석·김 3성이 상호 결혼했다. 다른 성씨의 딸을 3성의 집에 들일 수는 있어도, 3성의 딸을 다른 성씨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신라 소지왕이 백제 동성왕에게 딸을 주었다는 예가 있다고 하지만, 실은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6부 귀족의 딸이거나 누이였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입장에서는 자기 딸인 김선화의 미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이거나 동성인 김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선화공주는 신라인도 아닌 백제 부여씨인 서동의 아내가 될 수는 없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