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4편
■ 영조와 사도세자 4편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있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 어느 날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세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시를 읽을 것이로되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전교(傳敎)를 거두겠다.”라고 하였다.
그 시는 시경(詩經)의 한 편인 ‘육아시(蓼莪詩)’인데, 그 내용은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고, 영조는 양위 전교를 거두었다.
이 날 세자는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세자는 부왕을 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부왕이 찾는다하면 불안감이 극도로 올라 정상인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 22세, 이즈음 세자는 부왕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 질환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세자에 대한 질책은 혹독하고 모질었으며, 세자가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머리를 짓찧은 일이 다반사였다. 가장 극적인 것은 영조가 세자의 반성문을 받아보고 세자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본 후 상복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까지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한 일이었다. 당연히 세자도 상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擧措:행동)를 하십니까?”고 묻자, 영조는 “무엇을 뉘우치느냐 물었는데, 동궁은 후회한다고만 말하면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남의 이목을 가리는 데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긴장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영조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조를 뵙는 의례마저 빼먹는 일이 잦아졌다. 사도세자에게는 의대병(衣襨病)이 있었다. 의대증은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으로, 오늘날 현대 의학에 정식으로 있는 병명은 아니다.
의대병은 보통 의대(衣襨:왕실 옷) 한 가지를 입으려고 열 벌이나 이삼십 벌을 갖다놓으면 갑자기 옷을 태우는 이상한 병이었다. 한 벌을 순하게 갈아입으면 천만다행이었고, 시중을 드는 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의대를 입지 못했다. 아마도 "이 옷을 입으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세자로 하여금 옷을 입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 같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