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5편
■ 영조와 사도세자 5편
1757년 여름 영조를 따라 사도세자가 선왕의 능을 참배하던 날 큰비가 내렸다. 영조는 날씨가 이런 것은 세자를 데려온 탓이라고 말하면서 능에 이르기도 전에 사도세자에게 “도로 궁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이 장면은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 운영에 미숙한 것은 당연할 터인데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꾸중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1752년에는 세자가 멋대로 일을 처리하였다고 영조가 진노하자 세자는 홍역에 걸린 몸으로 3일 동안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죄를 빌어야 했고, 영조가 왕위를 넘기겠다며 창의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번엔 이마에 피가 나도록 엎드려 사죄해야 했다.
이 무렵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같은 궁궐 안에서 거주했어도 매우 멀었다. 세자는 궁궐에 있으면서도 길게는 1년 동안이나 진현(進見:임금께 나아가 뵘)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영조는 그런 세자를 특별히 찾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를 보고 싶지 않아하는 영조에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세손(世孫)이었다. 세손은 세자와 달리 공부하는 것을 즐겨했고, 영조는 각종 행사에 세자 대신 세손을 대동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으며, 급기야 대놓고 세손을 띄우기까지 하였다.
세자의 병은 계속됐다. 영조가 처방법을 묻자 의관들은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고, 영조는 사도세자의 온천행을 허락한다. 온양 온천에 도착한 사도세자는 잠시 휴식을 취했으나 마음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진 않았다. 조석으로 영조에게 문안을 거르는 경우도 잦아졌다. 오래도록 세자의 문안이 중지되면서 부자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는 병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학문에 힘쓰기보다는 바깥 출입을 자주 했고, 이런 상황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서도 목격되기도 했다. 1761년 4월 성균관 유생들은 세자의 유람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고, 영조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악재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마침내 대형 사고가 터졌다. 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영조 37년(1761년) 세자의 관서(關西)행이다. 사도세자가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영조 몰래 평안도(관서) 지방을 다녀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 직후인 5월 초, 서지수, 서명응이 세자를 면대해 아뢰었다.
“저하께서 비록 궐 안에 계시더라도 일종 일정을 중외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사온데 하물며 여러 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나이까. 천리에 갔다가 오신 몸이면서도 아직도 지척의 진현(임금을 배알함)은 행하지 못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예후이신데 아직도 아프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저하의 뉘우침을 의심할 것입니다.
관서행을 종용한 자, 관서행 뒤에 세자를 대신해 임금의 명에 비답(批答)한 내시를 회부해 죄를 밝히셔야 합니다. 세자는 관서로 여행을 떠나고서도 병이 났다며 내시로 하여금 임금께 올리는 비답을 대신 쓰게 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