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6편
■ 영조와 사도세자 6편
세자는 신하들의 관서행 거론에 “대조(영조)께서 아시도록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불만과 불안의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난 그 해 9월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영조는 뜻밖에도 승지들과 관원들을 벌주는 선에서 이 일을 조용히 덮었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고 세자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는 느낌이다.
조선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인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에 일어났다. 이 날 실록의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 정축년(1757년) 무인년(1758) 뒤부터 세자의 병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으며,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운명이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는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계기는 나경언의 고변(告變)이었다. 1762년 부원군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 등 노론 세력은 나경언(羅景彦)이라는 시정잡배를 매수하여 세자를 고변하게 했다. 나경언이란 자는 노론의 주요 인물인 윤급의 집에서 청지기를 지낸 자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서 살고 있던 자였다.
노론에 의해 매수된 나경언은 세자를 무고(誣告)하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적은 봉서(封書)를 직접 왕에게 올렸다. 나경언이 고변한 내용은 세자가 주변의 내시들과 결탁하여 역모(逆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정말로 역모(逆謨)를 꾸민 것일까? 일각에서는 이를 사실로 인정하기도 한다. 세자가 영조 37년 3월에 자기 대신 내관을 앉혀놓고 영조 몰래 평양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바로 이 평양행이 영조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들었던 세자가 과연 쿠데타를 모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오자 평양 밀행을 문제 삼은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라 올라올 정도로 세자의 움직임이 공공연히 간파당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역모(逆謨)를 꾸미기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사도세자가 정말 역모를 꾸몄는지, 아니면 모함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일개 시정잡배가 왕을 직접 만나 봉서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세자를 역모로 얽으려고 작정한 홍계희, 이해중, 홍봉한 등 노론 대신들의 흉계가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