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4편
■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4편
15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講和)회담을 가졌다. 가토는 “내가 명나라 사신과 회담하는데 조선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조선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풍중영과 단둘이 하루 종일 회담했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 조선 사람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가토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협상안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가토는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영토할양을 약속받으려 했고, 반면 풍중영은 먼저 왕자들부터 송환하라고 주장했다. 가토는 본토(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회답이 있어야 하므로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고, 선조가 영토할양에 관해 어떤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한 가토는 회담을 결렬시켰다.
그 대신 한양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키로 했다.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협상이 결렬되면 일본으로 끌려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가토에게 끌려 한양으로 왔고 같은 집에 머물렀다. 그때 한양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은 물론 왕자들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재개됐다. 가토는 이전과 같은 요구를 했고,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다. 1593년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고,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영토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1593년 7월 임해군과 순화군은 명군에게 넘겨졌다.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할양을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러자면 영토할양 묵인의 증표로 송환된 두 왕자를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두 왕자를 수행했던 신료들만 가혹하게 처벌했다.
선조는 자신과 왕자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조금도 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에게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을까?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이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칫 왜군의 남해안 점유가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은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써 끝날 수 있었다. 이렇듯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이고, 거기에 더해 선조의 무능함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