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2일 금요일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4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4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4편

당시 경종의 나이가 34세였고, 왕비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 아직 자녀가 없으나 그래도 즉위한 지 1년밖에 안 된 왕에게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삼으라 하니, 경종 입장에서는 매우 난감한 이야기이고, 역모(逆謀)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아들 없는 임금에게 후사 책봉을 하라고 한 이정소의 속셈은 연잉군을 옹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노론의 세상이었으므로 경종은 아무 대항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인원왕후(숙종의 세 번째 부인)도 연잉군을 지지하고 있던 터라 경종은 매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노론의 입장에서 왕세제(王世弟) 책봉의 결과는 자신들의 생사(生死)가 달린 문제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 저녁 영의정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경종에게 세자 책봉을 강요했다.

당시 경종의 나이가 34살이었다. 왕비인 선의왕후 나이는 고작 15살에 불과했다. 노론은 숙종 때 인현왕후가 24살이라는 점을 두어 아직 적장자 생산이 가능하다 하여 경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노론의 행동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이율배반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음을 보여준다. 당시는 노론의 힘이 왕권보다 쎘으므로, 결국 노론의 강압에 경종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쿠데타와도 같은 세제 책봉에 소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소론 유봉휘는 다음날 갑작스러운 세제 책봉 소식에 상소문을 올려 노론에게 경종을 협박한 죄를 물으며 공격했다. 하지만 노론의 반격으로 오히려 유봉휘는 귀양을 가고, 이에 힘을 얻은 노론은 경종에게 아예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연잉군은 사실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만큼 노론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에 책봉했다. 그러나 노론은 더 아나가 연잉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리청정은 왕이 명령을 내려도 신하들이 일제히 극구 반대해야 되는 일인데, 오히려 신하들이 나서서 이를 주청하니, 완전히 경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가 쫓아내겠다는 저의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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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는 소론 등 신하들의 극구 만류와 연잉군의 극구(?) 고사(固辭)로 무산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마도 정치적 쇼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 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결정적 근거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평소 행동이 불충하고 무례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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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