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5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5편
세자시절 대리청정 할 때는 정치공격에 의한 인사 조치를 극구 반대하던 경종은 단숨에 이 상소를 받아들인다. 노론들의 ‘연잉군 대리청정’ 요구를 묵묵히 참아오던 경종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이래 지속되어 오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직(削職), 문외출송(門外出送) 또는 정배(定配:유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되어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정국이 이렇게 노론에서 소론으로 전환을 이루었을 때 서얼 출신 남인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일어났다. 목호룡이 고변한 내용은 노론 측에서 숙종이 죽기 직전에 세자 이윤(李昀)을 3가지 방법, 즉 삼급수로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삼급수란 자객이 칼로 죽이는 대급수, 약으로 살해하는 소급수, 모해하여 폐출시키는 평지수를 의미했다.
",놀란 경종은 즉시 국청(鞫廳)을 열 것을 명했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잡혀왔다. 이 고변서에 연잉군(延㭁君)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어 연잉군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형인 경종에게 자신이 무관함을 눈물로 호소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왕족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살아남는 경우는 극히 드문 데, 경종이 살려 주는 바람에 연잉군은 여든 살 넘는 최장수 임금의 기록을 세웠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노론 4대신은 사사되었고,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된 사람이 170명을 헤아렸다. 바로 신축옥사(1721년, 경종 1년)와 임인옥사(1722년, 경종 2년)이다. 이를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그 후 정국은 소론이 장악하게 된다. 경종이 어느 정도 정권을 장악해서 나름대로 정국을 꾸려가려고 할 때, 경종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경종이 병석에 눕자 연잉군은 의가(醫家)에서 상극(相剋)이라고 말하는 게와 생감을 경종에 보낸다. 경종은 그것을 맛있게 먹고 나서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이에 연잉군은 어의(御醫)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함께 처방하라고 명을 내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으로 연잉군에 의한 경종 독살설이 영조 재위기간 내내 영조를 괴롭힌다. 경종 독살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많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지만, 숙종시대 당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영조가 충분히 의심 받을 만한 정황이 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신임옥사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그리고 세제(世弟)였던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사실 경종이 4년 재위하는 동안 맘만 먹으면 연잉군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이복동생 연잉군을 끔찍히 아끼고 보호해 주었다. 경종은 연잉군에 대한 소론들의 수많은 모략과 정치 공세 속에서도 그를 방어해주어 결국 연잉군이 왕(영조)으로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