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4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4편
왕위에 오른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영조는 나라가 바로 서려면 먼저 붕당 간의 치열한 다툼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붕당 간 치열한 경쟁을 없애는 탕평책을 강하게 펼쳤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만 보아도 영조의 뜻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영조는 뚝심과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심지가 약한 인물 같았으면, 이인좌의 난 이후 당장에 탕평을 접고 친위세력 위주로 정부를 구성했을 수도 있다.\xa0그렇지만 영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탕평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정적(政敵)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탕평책을 향해 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 할 수 있었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다.
영조의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영조에게 있어서 경종 독살설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실은 묻혀져 있었으나, 영조를 반대하는 소론들과 남인,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후 왕이 되었다고 믿었으며, 독살설을 믿는 자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경종 독살설을 잠재우기 위해 영조는 재위 17년째인 신유년에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발표했다.
",신유대훈이란 경종이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 것은 노론들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비와 경종의 하교에 의해 정당하게 임명된 것이라는 발표였다. 더불어 영조(英祖)는 자신이 역적의 괴수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던 임인옥안(壬寅獄案:임인옥사 보고서)을 불태우고 이를 종묘에 고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