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장수長壽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장수長壽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4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4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4편

왕위에 오른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영조는 나라가 바로 서려면 먼저 붕당 간의 치열한 다툼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붕당 간 치열한 경쟁을 없애는 탕평책을 강하게 펼쳤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만 보아도 영조의 뜻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

영조는 뚝심과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심지가 약한 인물 같았으면, 이인좌의 난 이후 당장에 탕평을 접고 친위세력 위주로 정부를 구성했을 수도 있다.\xa0그렇지만 영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탕평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정적(政敵)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탕평책을 향해 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 할 수 있었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다.

영조의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

영조에게 있어서 경종 독살설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실은 묻혀져 있었으나, 영조를 반대하는 소론들과 남인,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후 왕이 되었다고 믿었으며, 독살설을 믿는 자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경종 독살설을 잠재우기 위해 영조는 재위 17년째인 신유년에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발표했다.

",

신유대훈이란 경종이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 것은 노론들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비와 경종의 하교에 의해 정당하게 임명된 것이라는 발표였다. 더불어 영조(英祖)는 자신이 역적의 괴수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던 임인옥안(壬寅獄案:임인옥사 보고서)을 불태우고 이를 종묘에 고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3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3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3편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당연히 노론이 정권을 잡는다. 소론의 김일경은 귀양을 가고, 김일경의 상소로 죽은 노론 4대신은 복권되었다. 영조는 모친의 출생과 혈통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또한 진위(眞僞)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복형인 경종이 연잉군에게 독살 당했다는 설이 평생을 쫓아다닌다.

경종 독살설로 인해 김일경의 난과 이안좌의 난이 일어났고, 모반사건에 휩싸인 신치운은 영조의 친국(親鞫)에서 "나는 갑진년(경종의 사망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해 영조가 분통을 터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영조는 정통성 문제와 결부되어 ‘경종독살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당쟁의 한가운데서 위태로운 왕좌를 차지했고, 당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적당한 당쟁은 당파 간의 균형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지만, 지나친 당쟁은 그 균형을 깨고 왕권까지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등 일부 소론 세력 및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은 경기도 장악에 실패했고, 결국 난은 실패로 끝났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수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영조 입장에서는, 삼남 지방에서 고전했지만 수도권을 지킨 덕분에 정권을 지킬 수 있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인좌의 반란은 영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영조는 형의 지위, 그것도 이복형의 지위를 승계했다. 그 승계의 정당성마저 독살설로 의심을 받았다.

이인좌의 난은 이 같은 영조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영조한테는 치명상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은 영조에게 글 나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소수당 강경파뿐 아니라 많은 일반 백성들이 이인좌에게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영조는 반란을 진압했고, 그 덕분에 영조는 반대파의 상당 부분을 정계에서 숙청하고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결과를 거두었다.\xa0\xa0이것은 영조가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인 탕평책을 자신 있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인좌가 영조의 탕평정치를 위한 도화선이 되어준 셈이다.\xa0\xa0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2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2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2편

영조는 우리에게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오랜 재위기간 동안 탕평책과 여러 가지 정책 실현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그 기반 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초기만 해도 영조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정계에서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두 번째 계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대비는 평소 노론 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 연잉군을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諺敎:언문으로 쓴 왕비의 교서)를 몇 차례 내려 소론 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에 연잉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 숙종이 죽기 전부터 조선 정계는 경종(당시엔 세자)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조(연잉군)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종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였고, 영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숫적으로 우세였다. 경종은 생모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음으로써 죄인의 아들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영조는 출신이 천한데다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늘 따라다녔다.

영조는 경종이 설사를 하는데도 설사를 유발하는 처방을 내렸다. 《경종실록》의 개정판인 《경종수정실록》의 경종 4년 8월 20일(양력 1724년 10월 6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는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먹였다. 16세기에 명나라 사람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 되어있다. 이 지식은 18세기 조선 의료계의 상식이었다.\xa0

영조의 의문스러운 처방은 또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어의의 반대를 무시하고 인삼탕을 처방할 것을 지시했다. "인삼은 제가 조금 전에 올린 탕약과 상극입니다. "라며 어의가 반대하는데도, 영조는 인삼이 양기 회복에 좋다며 어의(御醫)의 말을 묵살했다.\xa0결국 영조의 처방대로 경종에게 인삼탕이 내려졌고, 다음 날 새벽 경종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영조는 왕이 됐다.\xa0\xa0《

경종실록》이나 《경종수정실록》에 묘사된 정황을 보면, 영조가 이복형의 죽음에 대해 의학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복형을 죽일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역으로 보면 살려보겠다는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론은 영조가 이복형을 독살했을 것이라고들 수군댔다. 그래서 새로 등극한 영조의 입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세상의 여론을 의식하면서 왕좌에 올랐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1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1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1편

장희빈의 죽음 이후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의 처리를 두고 서인은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었다. 경종은 나이에 비해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던 노론은 주상의 건강이 안 좋으니 차라리 연잉군(숙빈 최씨의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며 주청을 올린다.

이 소식을 들은 소론은 경종에게 이는 역모라며 노론 대표들을 이 기회에 모두 숙청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상시에 노론이 못마땅했던 경종은 슬그머니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대리청정(代理聽政)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辛丑獄事)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 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任人獄事)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때 수많은 노론 신하들이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 연잉군도 모역(謀逆)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고, 경종이 그를 아끼고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신축옥사, 임인옥사)을 합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후 1724년 8월 경종은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의 나이로 자식 한 명 두지 못하고 승하했다. 경종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으로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은 얼떨결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제21대 영조이다. 당시 영조는 왕자의 신분으로 결혼을 한 후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때였다.

물론 경종의 상태가 좋지 않아 어느 정도는 예상했겠지만 영조의 등극으로 노론은 하루아침에 집권 여당이 되고 주인 잃은 소론은 찬밥 신세로 전략해 버린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과정에서 젊은 나이에 경종이 승하한 탓에 경종에 대한 독살 의혹이 제기됐다. 왕세제인 연잉군(영조)이 보낸 간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점과 어의(御醫)의 말을 무시한 채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지병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 숙종의 시탕(侍湯:부모의 병환에 약을 써서 시중을 드는 것)을 4~5년간 한 것도 몸이 나빠진 원인이었다. 게다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로도 경종은 항상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경종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도 건강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경종실록》을 쓴 사관도 불안한 세자 생활이 경종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