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2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2편
영조는 우리에게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오랜 재위기간 동안 탕평책과 여러 가지 정책 실현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그 기반 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초기만 해도 영조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정계에서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두 번째 계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대비는 평소 노론 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 연잉군을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諺敎:언문으로 쓴 왕비의 교서)를 몇 차례 내려 소론 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에 연잉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 숙종이 죽기 전부터 조선 정계는 경종(당시엔 세자)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조(연잉군)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종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였고, 영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숫적으로 우세였다. 경종은 생모 장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음으로써 죄인의 아들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영조는 출신이 천한데다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늘 따라다녔다.
영조는 경종이 설사를 하는데도 설사를 유발하는 처방을 내렸다. 《경종실록》의 개정판인 《경종수정실록》의 경종 4년 8월 20일(양력 1724년 10월 6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는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먹였다. 16세기에 명나라 사람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 되어있다. 이 지식은 18세기 조선 의료계의 상식이었다.\xa0
영조의 의문스러운 처방은 또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어의의 반대를 무시하고 인삼탕을 처방할 것을 지시했다. "인삼은 제가 조금 전에 올린 탕약과 상극입니다. "라며 어의가 반대하는데도, 영조는 인삼이 양기 회복에 좋다며 어의(御醫)의 말을 묵살했다.\xa0결국 영조의 처방대로 경종에게 인삼탕이 내려졌고, 다음 날 새벽 경종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영조는 왕이 됐다.\xa0\xa0《
경종실록》이나 《경종수정실록》에 묘사된 정황을 보면, 영조가 이복형의 죽음에 대해 의학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복형을 죽일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역으로 보면 살려보겠다는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론은 영조가 이복형을 독살했을 것이라고들 수군댔다. 그래서 새로 등극한 영조의 입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세상의 여론을 의식하면서 왕좌에 올랐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