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1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1편
장희빈의 죽음 이후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의 처리를 두고 서인은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었다. 경종은 나이에 비해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던 노론은 주상의 건강이 안 좋으니 차라리 연잉군(숙빈 최씨의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며 주청을 올린다.
이 소식을 들은 소론은 경종에게 이는 역모라며 노론 대표들을 이 기회에 모두 숙청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상시에 노론이 못마땅했던 경종은 슬그머니 소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대리청정(代理聽政)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辛丑獄事)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 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任人獄事)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때 수많은 노론 신하들이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 연잉군도 모역(謀逆)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고, 경종이 그를 아끼고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신축옥사, 임인옥사)을 합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후 1724년 8월 경종은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의 나이로 자식 한 명 두지 못하고 승하했다. 경종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으로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은 얼떨결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제21대 영조이다. 당시 영조는 왕자의 신분으로 결혼을 한 후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때였다.
물론 경종의 상태가 좋지 않아 어느 정도는 예상했겠지만 영조의 등극으로 노론은 하루아침에 집권 여당이 되고 주인 잃은 소론은 찬밥 신세로 전략해 버린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과정에서 젊은 나이에 경종이 승하한 탓에 경종에 대한 독살 의혹이 제기됐다. 왕세제인 연잉군(영조)이 보낸 간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점과 어의(御醫)의 말을 무시한 채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지병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 숙종의 시탕(侍湯:부모의 병환에 약을 써서 시중을 드는 것)을 4~5년간 한 것도 몸이 나빠진 원인이었다. 게다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로도 경종은 항상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경종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도 건강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경종실록》을 쓴 사관도 불안한 세자 생활이 경종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