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3편
■ 장수(長壽)왕, 영조의 즉위 3편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당연히 노론이 정권을 잡는다. 소론의 김일경은 귀양을 가고, 김일경의 상소로 죽은 노론 4대신은 복권되었다. 영조는 모친의 출생과 혈통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또한 진위(眞僞)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복형인 경종이 연잉군에게 독살 당했다는 설이 평생을 쫓아다닌다.
경종 독살설로 인해 김일경의 난과 이안좌의 난이 일어났고, 모반사건에 휩싸인 신치운은 영조의 친국(親鞫)에서 "나는 갑진년(경종의 사망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해 영조가 분통을 터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영조는 정통성 문제와 결부되어 ‘경종독살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당쟁의 한가운데서 위태로운 왕좌를 차지했고, 당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적당한 당쟁은 당파 간의 균형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지만, 지나친 당쟁은 그 균형을 깨고 왕권까지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등 일부 소론 세력 및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은 경기도 장악에 실패했고, 결국 난은 실패로 끝났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수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영조 입장에서는, 삼남 지방에서 고전했지만 수도권을 지킨 덕분에 정권을 지킬 수 있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인좌의 반란은 영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영조는 형의 지위, 그것도 이복형의 지위를 승계했다. 그 승계의 정당성마저 독살설로 의심을 받았다.
이인좌의 난은 이 같은 영조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영조한테는 치명상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은 영조에게 글 나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소수당 강경파뿐 아니라 많은 일반 백성들이 이인좌에게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영조는 반란을 진압했고, 그 덕분에 영조는 반대파의 상당 부분을 정계에서 숙청하고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결과를 거두었다.\xa0\xa0이것은 영조가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인 탕평책을 자신 있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인좌가 영조의 탕평정치를 위한 도화선이 되어준 셈이다.\xa0\xa0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