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4편
■ 간신 이이첨 4편
정인홍을 비호하던 광해군은 성균관 유생들을 모조리 내쫓았고, 이듬해는 김직재의 무옥(誣獄)을 통해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을 처단해 버렸다. 이로써 대북파는 남인과 결별하고 소북파를 축출함으로써 정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영창대군이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광해군의 권좌가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통감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이첨은 1613년(광해군 5년)에 정인홍과 함께 본격적인 정권 굳히기에 나섰다. 대북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칠서의 옥’을 빌미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연금한 다음 강화군수 정항을 시켜 살해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로써 광해군의 권좌는 물론 대북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간의 악평은 피할 수 없었다.
이이첨은 1618년에는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약방제조, 1619년 대제학을 거쳐 1620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하면서 과거를 주관하게 되자, 많은 후진들을 조정에 받아들여 큰 세력을 형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썼던 당대의 풍운아 허균도 이이첨의 휘하에 있었다. 당시 이이첨은 조정에서 거론하기 어려운 사안이 있으면, 스스로 초안(草案)을 만들어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주어 상소를 올리게 한 다음, 광해군에게 초야(草野)의 공론(公論)이라고 아뢰었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1608년부터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양전 사업을 통해 농지를 확충했고, 전란 중에 불타버린 경복궁과 창덕궁, 인경궁을 중건했다. 북방에서 강성해진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건국하자 대포를 주조하고 수비를 강화하는 등 안보에도 만전을 기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면외교를 펼칠 때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원군(援軍)을 이끌던 강홍립에게 섣불리 후금군과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당시 내치(內治)는 대북파가 리드했지만, 외교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광해군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리를 중시하던 광해군은 전란 이래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재개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국조보감》 등을 편찬하고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했다. 당대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같은 명저(名著)가 나오기도 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