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5편
■ 간신 이이첨 5편
그 무렵 광해군은 상궁 김개시를 무척 총애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동궁의 시녀였는데, 광해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상궁이 되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세자빈을 간택할 때 박승종의 손녀를 선발하게 했다. 그런데 박승종이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유희분과 결탁하여 이이첨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분개한 이이첨은 김개시의 아버지와 교분을 맺음으로써 김개시와 소통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 후 이이첨은 함부로 드러내기 곤란한 내용은 언문으로 써서 김상궁에게 보여준 다음, 김개시가 은밀히 광해군을 설득하게 했다. 이이첨과 김개시가 한통속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이첨과 정인홍으로 대표되는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꾸준히 패착(敗着:바둑에서 나쁜 수)을 이어갔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킴으로써 정적들에게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했다. 또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반대함으로써 조선의 언론을 리드하던 사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623년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의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당시 이이첨은 반정 소식을 듣자마자 식솔들을 이끌고 남쪽 성벽을 넘어 이천의 시골집으로 도망쳤다가 관병에게 붙잡혔다. 당시 넷째아들 이대엽의 아내가 거사를 일으킨 신경유의 누이였으므로, 그는 며느리를 성내에 들여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64세의 이이첨의 목이 맨 처음 잘렸고, 아들 이원엽·이홍엽·이익엽 등이 뒤를 이었다. 넷째아들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10대에 이르는 동안 빠짐없이 대과에 급제했던 조선의 명가(名家) 하나가 사라지고 말았다.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정권을 농단하던 이이첨은 그 후 서인 정권이 이어진 구한말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이자 악인으로 치부되었고, 그의 저서와 문집은 유실되거나 소각되었다. 하지만 1908년 스승 정인홍이 복권되고, 이후 폭군으로 매도되었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이첨은 아직도 광해군을 다루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폭압적인 신료이자 간신배의 전형(全形)으로 등장하고 있다. 1908년에 정인홍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신원되었으나 그때도 그는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행동대장 격이었으나, 말년의 폭주 때문에 모든 악정(惡政)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대북의 영수로서 강한 권력을 휘둘러 서인 집권 이후 조선말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이이첨은 왕명조차도 항명(抗命)할 정도로 권력을 독식해 휘둘렀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듯 타 당파와 노선을 맞춘 적도 많고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며, 한명회 등 다른 시기의 독불장군형 권신(權臣)에 비해 의외로 주변 눈치도 많이 보던 인물이다. 이는 그가 제대로 된 학자가 아니라 정인홍의 권위를 빌려서 주로 정치적 싸움을 대리했던 행동대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