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어느 해 오월 단오에 어우동은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장면을 구경하다가 종실인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騏)를 만나 통정(通情)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선 제2대왕 정종의 아홉째 아들인 석보군의 서손(庶孫)이었다.

그 외에도 어우동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남성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든 남자에게는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도록 강요했다.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고,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다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는 특별히 어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자신의 팔뚝에다가 그의 이름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용재총화》, 《성종실록》, 《대동야승》 등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녀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된 승정원 승지 김계창의 추적과 줄기찬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어우동 사건은 공론화되었다. 어우동은 풍속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당사자 어우동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 정씨도 간통의 전력이 있었다. 세간에 간통이 만연하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종친이 관여되었다면 이는 왕실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는 중대 상황이었다. 성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그녀의 체포를 명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우동은 급히 도망쳤지만 곧 붙잡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심문과정에서 어우동은 좀처럼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실 출신이었으므로 국문을 가할 수 없었고,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극형에 처할 수도 없었다.

의금부에서는 우선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를 잡아들여 여죄를 캤다. 옥중에서 어우동과 대면한 방산수는 과거 세종 대에 음풍(淫風)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유감동의 경우처럼 관련자를 불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우동을 달랬다. 그의 설득을 듣고 어우동은 그 동안 관계했던 남성들의 이름을 모조리 토설(吐說)해 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 고관대작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관리들은 망연자실했다. 방산수가 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중신 어유소는 이웃에 살던 어우동과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옥가락지를 주며 후일을 기약했다는 것이었다. 어유소는 병조와 이조의 판서, 좌찬성 등 최고위직을 지낸 중신이었는데,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신성한 사당에서 음녀와 교합했다 하여 유림(儒林)이 들썩였다.

-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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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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