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조선의 팜므파탈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조선의 팜므파탈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5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5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5편

성종은 추문(醜聞)이 더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을 빨리 마무리해서 끝내고 싶었다. 결국 성종은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만 귀양을 보내고, 중신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등은 심문도 하지 않고 석방했으며, 김칭과 정숙지는 형식적인 심문을 거쳐 풀어주었다. 그 외의 사람들도 대부분 가벼운 처벌로 끝냈다. 성종은 어우동이 방산수의 조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우동의 처분을 두고 조정 대신들이 둘로 나뉘었다. 그녀는 왕실의 일가이므로 극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음행의 죄가 크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원로대신이었던 정창손이 태종과 세종 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며, 귀양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성종은 귀양이나 유배로 형을 정하고 불문에 부치려 하였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연일 어우동에 대한 공격 여론을 조성하였다. 결국 성종은 고심 끝에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를 들어 극형을 명했다.

하지만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므로 사형에 따른 범죄사실을 적시(摘示)해야 했다. 음행(淫行)을 그대로 적시할 수 없었던 의금부는 어우동의 혐의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죄’ 라 하고, 교부대시(絞不待時:즉시처형)를 결정했다. 교부대시(絞不待時)는 범죄 사실이 중한 경우, 시기에 관계없이 즉시 처형한다는 형벌이다. 원래 사형은 사형수의 원기(冤氣)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친다 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봄과 여름에는 집행하지 않는다. 어우동의 죄목이 간통이나 음행이 아니라 개가(改嫁)라고 한다면, 사형은 과도한 법 적용이 분명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어우동은 즉시 교형(絞刑: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삭제되었다.

항간에서는 그녀에 대한 처분이 너무 심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이 당시 기준으로 삼고 있던 명나라 법 대명률(大明律)에는 간통 처벌 규정이 남녀 모두 장(杖) 80대였다. 처녀든 총각이든 혼인 외의 성관계를 가지면 간통이고, 간통에 대해서는 곤장 80대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부녀는 10대를 더해 90대 형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어우동은 당시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장 80대 형이 맞는 듯 하다.

성종은 조선 전기 제도 정비에 힘쓰면서 성리학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고 확립한 왕이었다. 이러한 때에서 터진 ‘어우동 스캔들’은 성리학의 이념을 크게 훼손하는 사건이었다. 성종은 시범 케이스로 어우동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우동은 남성중심사회로 나아가는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한 시대적 희생양이었을까? 아니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욕정으로 가득 차 음행을 일삼았던 팜므파탈이었을까?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4편

어느 해 오월 단오에 어우동은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장면을 구경하다가 종실인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騏)를 만나 통정(通情)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선 제2대왕 정종의 아홉째 아들인 석보군의 서손(庶孫)이었다.

그 외에도 어우동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남성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든 남자에게는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도록 강요했다.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고,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다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는 특별히 어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자신의 팔뚝에다가 그의 이름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용재총화》, 《성종실록》, 《대동야승》 등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녀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된 승정원 승지 김계창의 추적과 줄기찬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어우동 사건은 공론화되었다. 어우동은 풍속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당사자 어우동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 정씨도 간통의 전력이 있었다. 세간에 간통이 만연하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종친이 관여되었다면 이는 왕실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는 중대 상황이었다. 성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그녀의 체포를 명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우동은 급히 도망쳤지만 곧 붙잡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심문과정에서 어우동은 좀처럼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실 출신이었으므로 국문을 가할 수 없었고,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극형에 처할 수도 없었다.

의금부에서는 우선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를 잡아들여 여죄를 캤다. 옥중에서 어우동과 대면한 방산수는 과거 세종 대에 음풍(淫風)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유감동의 경우처럼 관련자를 불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우동을 달랬다. 그의 설득을 듣고 어우동은 그 동안 관계했던 남성들의 이름을 모조리 토설(吐說)해 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 고관대작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관리들은 망연자실했다. 방산수가 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중신 어유소는 이웃에 살던 어우동과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옥가락지를 주며 후일을 기약했다는 것이었다. 어유소는 병조와 이조의 판서, 좌찬성 등 최고위직을 지낸 중신이었는데,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신성한 사당에서 음녀와 교합했다 하여 유림(儒林)이 들썩였다.

- 5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어우동은 쫓겨난 뒤 친정으로 갔지만 아버지 박윤창이 받아주지 않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여종과 함께 살았다. 당시의 도덕관념에 따르면 쫓겨난 여성은 자결하든지 죽은 듯이 살면서 남편의 처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어우동은 반대로 싱글로서의 자유를 만끽했다. 여종이 의기소침한 어우동을 위로하기 위해 사헌부 아전인 오종년을 데려오자, 봇물이 터진 듯 마음껏 욕정을 해소했다. 얼마 뒤 오종년과 결별하고 수십 명의 선비, 조관, 유생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가졌다.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그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妓女)가 되었다.

어우동은 여성교육이 제한되었던 당시 반가(班家)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시문에 뛰어났고 가무음곡(歌舞音曲)에 통달했다. 고귀한 종친의 이혼녀로서 미모에 열정과 지성미까지 갖추었으니 남자를 유혹할 만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던 셈이다. 어우동은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인물을 물색했다. 그녀의 레이더에 걸려든 사람이 전 남편 태강수와 6촌간인 종실의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爛)이었다. 이난은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의 넷째 서자로 성품이 호탕하고 시를 좋아하는 쾌남아였다. 그는 주변에 흔한 첩실이나 기생과는 전혀 다른 매력의 소유자 어우동에게 금세 매료되었고, 자청하여 팔뚝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시문(詩文)을 나누며 고상한 일탈을 즐겼다.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한 인물은 방산수 이난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팜므파탈로 등극한 어우동이 한 남자에 만족할 리 없었다.

자유로운 성생활에 빠져든 어우동은 이름을 현비로 바꾸고, 여종과 함께 반가(班家)의 소실이나 창기(娼妓)인 척하면서 사내 사냥에 나섰다.

권응인의 《송계만록》에는 익명의 부인이 지었다는 〈부여회고시〉가 실려 있다. 저자는 시는 뛰어나지만 행실이 아름답지 못하여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다. 통설(通說)에는 그녀가 바로 어우동이라고 한다. 1918년 장지연이 편찬한 12권짜리 한시집 《대동시선》에서는 이 시를 어우동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백마대 텅 빈 지 몇 해나 지났을까.

낙화암 세워져 많은 세월 흘렀구나.

만약 청산이 말할 수 있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을 텐데.

- 4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2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2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2편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음죽현 출신이다.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440년 쯤으로 보인다. 용재총화에는 어우동(於于同),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으며, 송계만록(松溪漫錄)과 대동시선, 해동시선, 연려실기술 등에도 어우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어우동에게는 일찍부터 마음에 둔 이웃집 남자가 있었지만, 그 남자의 집안이 한미하여 부모가 반대하였고, 그녀는 눈물의 이별을 했다. 그 뒤 집안에서 정해준 종실인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과 결혼하여 외명부의 품계인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다. 이동은 세종의 둘째 형이자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 영천군의 서자였다. 그러나 그 후 어우동의 이름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역시 음행을 저질렀던 친정어머니 정씨 역시 친정과 시댁의 족보에서 삭제되었다. 어우동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박윤창도 족보에서 삭제되어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우동은 태강수와의 사이에서 딸만 한명 얻었을 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우동은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견뎌야만 했고, 결국 딸과 함께 시댁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쫓겨난 이유로 남편 태강수가 연경비라는 기생(첩)을 사랑해서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냈다는 설과 어우동이 자기 집에 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은장이와 간통을 해서 남편 태강수가 쫓아냈다는 설이 있다.

『어우동은 집안에 들인 은장이를 유혹하여 수시로 간통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태강수 이동이 분노하여 내쫓았다고 한다. 한데 종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서는 사실 태강수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렸다며 임금에게 고발했다.』 - 《조선왕조실록》 1480년(성종11년) 10월 18일 -

이로 보아 어우동이 은장이와 간통했다는 혐의는 아내를 쫓아내기 위한 무고였을 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태강수 이동은 기생에게 빠져 함부로 부인을 버린 죄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성종이 내린 판결에 따르면 이때 어우동의 간통사건은 무죄이고, 기생을 사랑한 남편 이동의 잘못으로 여겨져 이혼은 무효화된 것이다. 부인과 재결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동은 거부했다. 하지만 종친이었던 이동은 3개월 뒤 관직을 되찾았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태강수의 부인이었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 3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1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1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1편

남성 중심의 성리학적 도덕관념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사대부가의 여자들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남녀차별 아래에서, 사회활동도 배제당한 채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남녀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고, 부득이 외출해야 할 경우에는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려야 했으며, 사방이 가로막힌 가마에 올라 죄인처럼 조용히 거동해야 했다.

집안의 선택에 따라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인을 하고, 시집간 뒤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바람난 남편을 향해 눈꼬리만 치켜떠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의 굴레를 씌워 집안에서 쫓겨났다. 태종 때에는 간통은 물론 세 번째 결혼하는 삼가(三嫁)까지 음란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자녀안(姿女案)에 기재하여 자손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그처럼 엄한 성리학적 규범 속에서 여성이라는 것을 무기로 남성사회를 크게 뒤흔들고 충격을 안겨준 여인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까지 조선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어우동(於于同)이다. 당시 어우동은 도덕 질서를 교란시킨 음녀(淫女)로 규정되어 처형되었다. 성리학적 정치이념과 유교적 도덕관념이 자리 잡았던 성종 대에 종실(宗室) 출신의 어우동이 벌인 엄청난 엽색행각이 드러나자 조야(朝野:조정과 민간)가 발칵 뒤집혔다. 어우동의 음행은 노비, 중인, 양반, 왕족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근친상간이라는 절대금기까지 깨뜨렸다.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인 <성종실록>에는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사건이 엄청난 화제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장 100대, 도(徒:구속형) 3년에 고신(告身: 관리의 임명장)을 모조리 박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니, 왕이 명하여 은을 대신 바치게 하고, 고신을 거두고서 먼 지방에 보내게 하였다.』 -1480년(성종11년) 7월9일-

이에 따르면 태강수의 아내인 어우동이 방산수, 수산수 등 왕실의 종친들과 간통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 2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