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5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5편
성종은 추문(醜聞)이 더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을 빨리 마무리해서 끝내고 싶었다. 결국 성종은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만 귀양을 보내고, 중신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등은 심문도 하지 않고 석방했으며, 김칭과 정숙지는 형식적인 심문을 거쳐 풀어주었다. 그 외의 사람들도 대부분 가벼운 처벌로 끝냈다. 성종은 어우동이 방산수의 조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우동의 처분을 두고 조정 대신들이 둘로 나뉘었다. 그녀는 왕실의 일가이므로 극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음행의 죄가 크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원로대신이었던 정창손이 태종과 세종 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며, 귀양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성종은 귀양이나 유배로 형을 정하고 불문에 부치려 하였으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연일 어우동에 대한 공격 여론을 조성하였다. 결국 성종은 고심 끝에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를 들어 극형을 명했다.
하지만 조선은 엄연한 법치국가였으므로 사형에 따른 범죄사실을 적시(摘示)해야 했다. 음행(淫行)을 그대로 적시할 수 없었던 의금부는 어우동의 혐의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죄’ 라 하고, 교부대시(絞不待時:즉시처형)를 결정했다. 교부대시(絞不待時)는 범죄 사실이 중한 경우, 시기에 관계없이 즉시 처형한다는 형벌이다. 원래 사형은 사형수의 원기(冤氣)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친다 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봄과 여름에는 집행하지 않는다. 어우동의 죄목이 간통이나 음행이 아니라 개가(改嫁)라고 한다면, 사형은 과도한 법 적용이 분명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어우동은 즉시 교형(絞刑: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삭제되었다.
항간에서는 그녀에 대한 처분이 너무 심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이 당시 기준으로 삼고 있던 명나라 법 대명률(大明律)에는 간통 처벌 규정이 남녀 모두 장(杖) 80대였다. 처녀든 총각이든 혼인 외의 성관계를 가지면 간통이고, 간통에 대해서는 곤장 80대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부녀는 10대를 더해 90대 형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어우동은 당시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장 80대 형이 맞는 듯 하다.
성종은 조선 전기 제도 정비에 힘쓰면서 성리학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고 확립한 왕이었다. 이러한 때에서 터진 ‘어우동 스캔들’은 성리학의 이념을 크게 훼손하는 사건이었다. 성종은 시범 케이스로 어우동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우동은 남성중심사회로 나아가는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한 시대적 희생양이었을까? 아니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욕정으로 가득 차 음행을 일삼았던 팜므파탈이었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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