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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 조선의 팜므파탈, 어우동 3편

어우동은 쫓겨난 뒤 친정으로 갔지만 아버지 박윤창이 받아주지 않자,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여종과 함께 살았다. 당시의 도덕관념에 따르면 쫓겨난 여성은 자결하든지 죽은 듯이 살면서 남편의 처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어우동은 반대로 싱글로서의 자유를 만끽했다. 여종이 의기소침한 어우동을 위로하기 위해 사헌부 아전인 오종년을 데려오자, 봇물이 터진 듯 마음껏 욕정을 해소했다. 얼마 뒤 오종년과 결별하고 수십 명의 선비, 조관, 유생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가졌다.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그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妓女)가 되었다.

어우동은 여성교육이 제한되었던 당시 반가(班家)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시문에 뛰어났고 가무음곡(歌舞音曲)에 통달했다. 고귀한 종친의 이혼녀로서 미모에 열정과 지성미까지 갖추었으니 남자를 유혹할 만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던 셈이다. 어우동은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인물을 물색했다. 그녀의 레이더에 걸려든 사람이 전 남편 태강수와 6촌간인 종실의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爛)이었다. 이난은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의 넷째 서자로 성품이 호탕하고 시를 좋아하는 쾌남아였다. 그는 주변에 흔한 첩실이나 기생과는 전혀 다른 매력의 소유자 어우동에게 금세 매료되었고, 자청하여 팔뚝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시문(詩文)을 나누며 고상한 일탈을 즐겼다.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한 인물은 방산수 이난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팜므파탈로 등극한 어우동이 한 남자에 만족할 리 없었다.

자유로운 성생활에 빠져든 어우동은 이름을 현비로 바꾸고, 여종과 함께 반가(班家)의 소실이나 창기(娼妓)인 척하면서 사내 사냥에 나섰다.

권응인의 《송계만록》에는 익명의 부인이 지었다는 〈부여회고시〉가 실려 있다. 저자는 시는 뛰어나지만 행실이 아름답지 못하여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했다. 통설(通說)에는 그녀가 바로 어우동이라고 한다. 1918년 장지연이 편찬한 12권짜리 한시집 《대동시선》에서는 이 시를 어우동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백마대 텅 빈 지 몇 해나 지났을까.

낙화암 세워져 많은 세월 흘렀구나.

만약 청산이 말할 수 있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을 텐데.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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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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