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4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4편
그러나 국력의 열세는 의분(義憤)만으로 만회할 수는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의병 노장(老將) 유홍석은 치욕과 절망감으로 벽장에 있던 칼을 꺼냈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를 불렀다. “내 이제껏 나라를 구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국운이 기울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땅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니, 너희는 나의 이 마음을 거울삼아 강토를 되찾는 데 열정을 기울이거라. 나의 자결이 너희에게 슬픔이 되지 않고, 뜻을 바로 세우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듣던 며느리 윤희순이 말한다.
“아버님의 뜻은 참으로 귀하고 뭇사람이 경배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살아서 싸워도 힘이 모자라는 판국이고, 죽음을 보여준다 하여도 적들이나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무슨 놀라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굳세게 살아 내서 목숨을 걸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더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버님, 칼을 거두시고 저희와 함께 뒷일을 도모하소서.”
며느리의 말을 들은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마당으로 걸어갔다. 정미의병 때 다리를 심하게 다쳐 절뚝거리는 그는 마을 아래로 펼쳐진 길을 한참 내려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며느리의 말이 구구절절 옳지 않은가. 이 날 이후 유홍석과 유제원 부자는 만주로 떠났다. 윤희순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1911년 발산리 시골집의 좁다란 마당에서 한 소년이 고통에 몸을 뒤틀고 있었다. 윤희순이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맏아들 유돈상이었다. 회초리로 17세 소년을 매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제 경찰이었다. 유홍석이 의병 활동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들이 시아버지의 행방을 캐물어도 윤희순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소년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17세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찢어지는 옷에 피가 배어들었다. “이제 유홍석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라. 네 아이를 죽이겠다.” 그러자 윤희순이 나직이 말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아이도 죽이고 나도 죽여라. 너 같으면 네 아비를 팔아 네 자식의 목숨을 살리겠느냐.” 여인의 당찬 태도에 경찰들도 움찔하여 쓰러진 소년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이후 윤희순의 친인척들은 모두 짐을 싸서 중국 요령성으로 향했다. 의병장 유인석과 유홍석을 중심으로 친척, 처가 45가구가 만주로 집단이주를 한 것이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요령성 흥경현 평정산 ‘고려구’였다. 이곳은 ‘고려구’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주변에 조선인이 많았다. 주민들은 조선에서 하는 방식대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밀, 콩, 옥수수 농사를 주로 하던 한족은 조선인에게 새로운 농법을 배우기도 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