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4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4편
이이는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적절한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황은 이(理)와 기(氣)를 분리해서 이원론(二元論)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이는 이(理)와 기(氣)를 하나로 보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황은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아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데 비해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서 진리성을 찾았다. 그래서 이황이 줄곧 벼슬자리를 고사(苦辭)하고 재야(在野)에서 제자양성과 학문증진에 힘쓴 반면, 이이는 줄곧 중앙 정부에서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이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때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상황에 맞도록 폐법(弊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의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해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下向)식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로(言路)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爲政者)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이에게 민중의 소리를 듣는 것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 여겨졌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의견이 곧 국시(國是)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성리학적 보편적 윤리를 전파하기 위해 전국에 향약(鄕約:향촌의 자치규약)을 보급했다.
이 향약의 사회적 기능은 지방 사족(士族)의 주도로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