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5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5편
이이는 경제를 담당하는 관청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기성 관료가 아니라 행정에 밝고 국사를 염려하는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義理)와 실리(實利),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조선 후기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가 끼친 영향은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습(弊習)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크게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東西)의 분당(分黨)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政爭)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궁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곧 닥칠 전란(戰亂)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歸結)인지도 모른다.
이이는 원래 붕당(朋黨)을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시비(是非)로 인하여 분당(分黨)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그 해소에 진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붕당론(朋黨論)을 수정하게 된다. 지금껏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가 율곡 이이가 처음부터 서인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적인 것이고, 분당(分黨) 초기 율곡은 분당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이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 심해질 즈음 당시 우의정 노수신을 찾아가 제안하였다.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 모두 학문하는 선비이니 흑백을 가리고 사악함과 바름을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또 틈이 벌어졌지만 정말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떠도는 말로 이간질을 하여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어서 떠도는 의논을 진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정쟁의 당사자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 시끄러운 정쟁을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들은 노수신은 그 제안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판단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얼마 후 선조를 면대하는 자리에서, 이이의 의견에 따라 두 사람을 외직에 내보내자고 건의하였다. 당시까지 두 사람의 대립을 잘 몰랐던 선조는, “두 사람이 서로 무엇을 다투고 있는가?” 하고 하문하자, 노수신은 “서로 지난날의 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답변하였다. 노수신의 답변을 들은 선조는 이이가 건의한 원안대로 두 사람을 외직에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홍문관 정자 김수는 “이제는 전하께서도 이미 그런 사실을 아셨고, 두 사람의 재주가 쓸 만하니, 반드시 외직으로 보내지 않아도 저절로 풀리고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