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5편
■ 진주대첩 5편
왜군의 주 무기는 신식 무기인 조총(鳥銃)이었다. 조총의 사거리(射距離)는 100~200m 내외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 보유율은 전투원의 약 30%로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된 조총의 수는 약 4,500정 정도였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비해 조선군의 주 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시민(金時敏)은 『사전에 염초 510근과 총통 170자루를 제작했다.』 고 되어 있다. 염초(焰硝)는 화약의 원료를 말하고, 총통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다. 총통(銃筒)이란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각종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병기로 종류가 다양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게도 개인용 화기(火器)가 있었던 셈이다.
승자총통(勝字銃筒)의 발사 원리는 조총과 비슷하지만 수동식 점화(點火)라는 게 다르다. 심지에 불을 붙이면 탄환이 발사된다. 승자총통(勝字銃筒)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한 번 발사에 화약 37g을 사용하며, 15개의 철환을 발사할 수 있고 조준거리는 600m 정도로 조총보다 3배 멀리 날아간다고 한다.
또한, 장전(裝塡)과 휴대가 간편하고 총신을 길게 해서 유효 사거리와 명중률을 높인 것으로, 속도는 현대식 소총과 맞먹고 파괴력은 3cm 두께의 송판을 뚫을 정도의 놀라운 힘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수동식 점화여서 발사 간격이 길고 조준 사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조선군은 승자총통을 포함한 대형화기가 있었다. 수적인 면에서나 성능 면에서 왜군의 조총이 조선군의 화기보다 우세했지만, 막상 조총을 앞세우고 공격해 온 왜군은 사거리(射距離)가 우수한 승자총통(勝字銃筒)과 활 때문에 성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주성의 난공불락(難攻不落)에는 무기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은 각지에 왜군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백성들의 원성이 심하여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지만, 진주성은 경상감사가 직접 성을 쌓고 참호를 파도록 독려해 외성(外城) 바깥에 거대한 연못을 파고 해자(垓子:성밖을 둘러 판 못)까지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성은 해자가 없다. 판다고 해도 물을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진주성은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물을 채웠기 때문에 공격을 막아내는데 유용하였다.
또 적이 공격해오면 가만히 있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면 그 틈을 타서 맹공을 퍼붓는 전술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왜군은 막대한 양의 탄환을 허비하며 당황했고, 적은 숫자로 많은 왜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의 중요한 성공 요인 중 하나이다. 전투 첫날, 김시민은 군세(軍勢)가 웅장하게 보이도록 성안의 남녀노소에게 모두 남장을 시켜 성곽에 배치시켰다. 당시 조선의 도성과 남한산성의 수비 영역은 1척당 1명이었다. 당시 진주성의 둘레는 약 1만 척이었으므로 진주성을 수비하려면 적어도 1만 명의 병력이 필요 했는데, 3800여명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