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6편
■ 진주대첩 6편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의령을 지키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200명의 의병을 보내왔다. 이를 필두로 최강, 정길용, 최경회 등이 이끄는 의병들도 속속 도착하여 진주성 외곽에 포진했다. 호남에서 온 의병도 상당수였는데, 진주성을 지켜내는 것은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군(援軍)들은 적들과 교전할 만한 병력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후방에 머물면서 적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밤이 되면 성 주변에 나타나 횃불을 켜고 호각(號角)을 불면서 대규모의 부대가 있는 것처럼 하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일종의 심리전(心理戰)인 것이다.
압도적인 적에 둘러싸여 성을 지키는 수성전(守成戰)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다. 이 외로운 싸움에 큰 힘이 되는 것은 바로 원군(援軍)이다. 원군의 존재는 그 병력과는 상관없이 그 이상의 위력이 있다. 원군의 존재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립된 것이 아니고 돕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전의(戰意)를 높이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효과를 가진다.
반면에 일본군은 군사를 둘로 쪼개어 진주성과 원군이 협공(挾攻)하는 것을 막아야 하니 온전히 모든 힘을 진주성 공격에 쏟을 수는 없게 된다. 자연히 진주성의 군민은 적의 전력분산이라는 효과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원군(援軍)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적은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초조함으로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전술과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주성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워진 왜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장비를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나무를 기다랗게 엮은 죽편(竹片)은 화살을 막기 위한 집단 방패였다. 성벽 높이로 흙을 쌓아 토산(土山)을 만들고, 성안을 향해 사격하기 위해 토산 위에 망루를 설치하였다. 사격용 장비로 성벽 높이만큼 만든 산대(山臺:무대처럼 만든 높은 발판)는 바퀴가 있어 기동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당시 성안에는 왜군의 장비에 대응할 만한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玄字銃筒)이었다. 화약을 이용해서 철환이나 대형 화살을 발사하는 것인데 그 위력이 엄청났다. 한번 발사에 화살은 800m, 철환은 1km 이상을 날아간다고 한다.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폭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있었는데, 우리의 독창적인 시한폭탄 같은 무기이다.
도화선이 감긴 나무를 비격진천뢰에 넣고 불을 붙이면 화약이 폭발, 내부에 있던 철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이처럼 진주성 안에는 각종 무기가 준비 되어 있었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그 위력이 대단했고, 조선군은 이들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원군들까지 도착하여 일본군을 앞뒤에서 흔들어대니 개전(開戰) 이후 단일 전투에서 최대 규모의 병력과 전력을 기울인 일본군은 절대적인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진주대첩의 막바지 전투는 왜군의 총공세가 펼쳐졌고, 필사적인 조선군의 저항이 부딪히며 불꽃 튀는 전투가 벌어졌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