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7월 15일, 저녁 또 다시 쉬지도 못하고 죽기 살기로 도주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거제 북방. 거제 장목과 칠천도 사이의 좁고 긴 물목인 칠천량이었다. 조선 수군의 무덤으로 운명의 장소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쫓겨만 다니고 눈앞에서 동료들이 표류되어 죽어가는데 또 도주해야 했으니, 기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사기는 떨어지고 모두 탈진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깊은 잠에 빠져든 그 시각, 이미 조선 수군을 가두는 일본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고 있었다.
좁은 물목 양쪽 끝을 일본군 전함들이 봉쇄하고, 칠천도와 거제도 장목에 일본군이 이미 상륙해서 점령했다. 수륙 양면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해서 모두 잠든 새벽에 기습, 협공한다는 일본군의 전략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7월 16일 새벽에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임진년부터 이순신장군에게 계속 패하며 당했던 수모를 이번 기회에 씻으려는 듯 일본군의 각오는 대단했다.
기습당한 조선 수군은 무기력하게 격파 당했다. 명령과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과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고, 조방장 백기 배흥립은 중상을 입고 실종되었다. 조방장 김완은 함대의 후미를 맡아 싸우다 실종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결국 함대는 각 수영(水營)별로 퇴각하기로 했다. 이미 지도자를 잃은 부대들은 우왕좌왕 오합지졸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12척의 함대를 빼내어 탈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12척의 배는 명량해전에서 귀중한 조선함대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배설이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 라고나 할까, 마지막 함대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후퇴했다고도 한다.
가리포 첨사 이응표는 직속상관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구원하지 않고 탈출했다 하여 살아서 복귀했지만 그 죄가 중하므로 파직되었고, 통제사 원균의 아우인 종사관 원전은 형과는 다르게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통제사 원균은 도주하여 중위장인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고성 춘원포에 상륙했지만 쫓아온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결국 7월 16일, 이 하루의 전투로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모두 전사했고, 그 외 상당한 수의 장졸이 전사하고 도주하였으며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전함 12척 외의 모든 함선을 잃었다. 조선 수군의 전멸. 참담한 패전이었다.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했다.
칠천량 해전은 당일의 전투행위 자체도 졸렬하고 무능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대패를 일으킨 것은 출정부터 칠천량에 정박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전쟁에 진 장수를 모두 비겁하고 무능하다고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만반의 대비와 노력을 하고 혼신의 힘으로 대적해도 역부족이었다고 하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