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5편
■무령왕릉 5편
2009년 12월 8일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던 뼛조각 4개가 무려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발굴현장이 워낙 엉망이었던지라 바닥에 있는 유물들을 빗자루로 봉투에 쓸어 담아 가져가다 보니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이 얼마나 비전문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이다. 발굴 유물의 이송과 보존 과정에서도 발굴조사단과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1970년대 당시 공주박물관의 시설이 미흡해서 서울로 이송하여 보존하려고 했는데, 공주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는 공주의 유물을 영구히 서울에 가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몰려와서 단 한 점도 서울로 가져가게 할 수 없다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옮겨갔던 무령왕릉의 유물은 그 뒤 새로운 국립공주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대부분 공주로 다시 돌아왔다.
총체적으로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발굴단도, 기자도, 주민들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숙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결국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미숙한 탓에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50년 전 한국 고고학(考古學)의 수준이 오늘날과는 크게 달랐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의 모든 유적 발굴은 대부분 일본인 학자들이 독점해 주도하였으며, 더러 서양인이 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단순 일꾼이나 낮은 위치에서 보조 역할만 맡았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한꺼번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후회스러운 발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실패는 후대 한국 고고학계의 반면교사가 되어 그 뒤 경주 고분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다, 무령왕릉 발굴과 같은 일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이후 우리 고고학의 큰 성장을 이룬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현재는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에는 꼭 현장 지휘부의 설치와 경비가 중시된다. 천마총 발굴 때에는 전체 브리핑 외에는 기자들의 보도를 최대한 통제하고, 발굴단원들이 기자들의 취재에 일부러 응하지 않거나 발굴현장에 철조망을 치는 등 현장을 거의 봉쇄한 상태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