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6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6편
반정(反正)에 성공한 이튿날 아침 능양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갑자기 병사들이 몰려오자 무슨 일인지 몰라 문을 걸어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녀로서는 최후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귀가 군사를 시켜 담장을 넘어 문을 열게 한 다음 경운궁 안으로 들어가 바깥뜰에서 울면서 고했다. 인목대비가 내시를 시켜 까닭을 묻자, 이귀는 자신들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고하면서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행차를 꺼리자 능양군이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가 인목대비를 뵙고 행차하기를 재촉했다. 능양군은 경운궁에 이르자 말에서 내린 뒤 서청문을 통해 궁 안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했다.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왔사오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인목대비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절차에 따라 능양군에게 어보(御寶:옥쇄)를 전달한 뒤,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했다. 반정의 주역들은 광해군 측의 반격을 염려하여 현장에서 곧바로 즉위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에서 예식을 치르게 했다. 이튿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했는데, 앞부분에 광해군에 대한 분노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 선조)의 아들이 된 자가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인목대비는 당시 광해군의 죄를 38가지나 열거했다. 그 첫째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들었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을 신념화한 서인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이어서 광해군대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중립외교를 한 것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을 광해군의 악행으로 열거하였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