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7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7편
서인 주도의 반정이 성공한 이후,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경운궁에 감금되어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인목대비 앞에 광해군은 죄인 신분이 되었다. 반정 이후 왕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가족과 함께 쓸쓸히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훗날 바람 많은 제주에 이배(移配:귀양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되어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핍박한 것을 패륜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즉위 후 인목대비에 대해 존호(尊號)를 높여주고, 잔치를 자주 베풀면서 광해군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나갔다.
인목대비는 이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안성의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명공주가 혼인하여 출궁한 뒤 인목대비는 계속 창덕궁에 머물렀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옮겨 살았다. 1631년부터 잦은 설사와 복통, 고열로 잠 못 이루던 인목대비는 1632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인목대비는 글씨를 잘 써서 많은 한글과 한문 친필이 남아있다. 『열성어필 숙종대왕편(列聖御筆肅宗大王篇)』에서는 인목왕후의 서예 풍격에 대해 "더욱 건강(健强)하고 천기(天機)가 비동(飛動)하며, 서운(瑞雲)이 휘상(輝祥)하다. 종이는 오래 되고 먹은 새로우나 여전히 향기가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왕후의 서예가로는 인목왕후가 최초이며, 기존의 여류서예가보다도 격(格)과 질(質)이 높은 글씨를 썼고, 그리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더불어 서예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다는 평이 있다.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불리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이다.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