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松江 정철 6편
■ 송강(松江) 정철 6편
1585년 8월에 이르러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마침내 정철은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6년(선조 19년) 10월에 조헌이 이이, 성혼, 박순과 함께 정철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거절당했다. 1587년 3월 묵재 이귀가 상소하여 그를 복권시키고자 애썼지만 동인의 격한 반대로 모두 실패한다. 1588년(선조 21년) 조헌이 다시 상소문을 올려 정철을 변호했지만 왕이 듣지 않아 무산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정철은 처음에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동인들의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고향 담양에 돌아가 1589년 10월 초까지 약 4년여 동안 은거하며 작품 생활에 들어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이 가사 작품에서 그는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경이로움, 은둔생활에 대한 동경을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한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서인의 모사가인 송익필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箚子:간단한 상소문)를 올리게 되었다. 이 상소문에서 정철은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죄인을 심문하게 하였다.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잔인하게 추궁했다.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여 죄가 감해져,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사건의 수사와 국문을 맡은 정철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옥사(獄事)가 지나치게 확대되자,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배후에는 선조의 의도적인 사건조작이 있었기에 소용없었다. 이후 3년간의 과정에서 정여립의 친구, 일가족과 자주 교류한 사람, 일족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까지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1천여 명의 동인계 인사들이 처형되고 옥사하였는데,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최종 지휘자는 선조였다.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 아직도 논란이 있으나, 거기에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후일 선조가 정철을 버린 과정을 볼 때, 서인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동인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供招:진술서)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 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매우 아쉬움으로 남는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