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松江 정철 7편
■ 송강(松江) 정철 7편
정여립 모반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면서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한 정철은 이듬해 2월 좌의정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작되었고, 난을 바로잡은 공으로 2등 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정철은 동인 중에 평소에 과격한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하였다.
1591년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정철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 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선조는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신료들의 입장에서도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기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기로 했는데,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의 이산해가 도중에 슬쩍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서 광해군을 후계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 가장 큰 위기에 직면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이 정철을 탄핵하기 위해 취한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하여 광해군에 대한 세자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을 손보기 위해 정철을 밟아 버리기로 결심을 굳혔다. 실록에 의하면,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고 한다.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된 정철은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3일 만에 명천에서 다시 경상남도 진주로 배소가 옮겨졌다가, 이어 3일 만에 다시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다시 이배되었다. 강계로 배소가 옮겨진 뒤 동인들의 거듭된 탄핵으로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이 기간 중 정철은 대부분 독서와 사색으로 시간을 보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 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고변하게 되었다고 자복(自服)하고는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이는 결국 정여립 모반사건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고,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 된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당시 동인은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강경파(이산해)이자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북인, 온건파(류성룡)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 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다.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을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