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화요일

효종 6편

■ 효종 6편

■ 효종 6편

효종(孝宗)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과연 왕권강화만을 위해 북벌(北伐)을 추진했을까?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반청적(反淸的) 사림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반청적 사림세력 역시 재기를 위해서는 효종의 지원이 있어야 했으니, 그들의 정치적 의도는 북벌론(北伐論)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인질시절 청나라 전쟁터를 누빈 효종에게 북벌은 청에 대한 실질적인 불안감의 해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기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군왕의 권력은 강력해 질 수가 없다. 그런데 사대부가 목숨과도 같이 숭배하는 주자의 나라 명을 오랑캐인 청나라가 침범했고, 그 오랑캐에 인조는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또한 계통을 중시하는 주자의 나라에서 큰아들도 아닌 몸으로 조카들을 두고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는 사대부의 지지를 얻을 묘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더더욱 컸다. 이에 효종이 사대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주자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멀리하는 것, 즉 북벌(北伐)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나라는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 오랑캐였지만, 과연 멸망한 청나라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곳은 요동이었다. 중국을 차지했던 청(淸)이 멸망하여 요동지역으로 돌아온다면, 조선은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조선은 북벌을 주장함으로써 계속 청(淸)의 동향을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효종이 북벌을 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북벌은 효종이 현실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목표라기보다는 북벌을 강조함으로써 사림의 지지를 얻겠다는 정치적 계산과 쉽게 침략당하지 않는 단단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합쳐진 시대적 소명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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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은 문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대무신(輪對武臣)제도를 만들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무신을 문신보다 우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무신 우대는 이후 정조와 대원군 시절 두 번에 걸쳐 더 있게 되는데 이런 철학을 가진 왕들은 다 괜찮은 통치자들이었다. 효종(孝宗)은 개명(開明)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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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믿은 신하들을 끝까지 믿고 간언을 듣는 현군(賢君)이었으며, 언제나 인재에 목말라했다. 북벌은 둘째 치고 참으로 안타깝게 요절한 쓸 만한 왕이었다. 효종(孝宗)은 겨우 재위 10년을 채우고 죽고 말았는데, 그가 10년만 더 재위했어도 아마 조선은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효종은 즉위 명분인 북벌의 실천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인 1659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청나라의 계속적인 군사력 축소 압박과 내수에 치중해야 한다는 송시열 등의 견제,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사대부와 백성들의 소극적인 입장 등이 맞물리면서 북벌은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채 꿈에 그치고 말았다. 효종은 군사력을 키우고 군량미를 모았지만, 청나라를 치려는 뜻으로 신하와 백성을 하나로 모으지는 못했다. 결국 십 년 동안 준비했던 북벌 계획은 효종의 죽음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