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화요일

효종 7편

■ 효종 7편

■ 효종 7편

효종의 사인은 종기였다. 종기의 독이 계속 오르자 의관이 침을 놨는데 이것이 혈맥을 찔러 버렸다. 북벌을 야심 차게 준비한 왕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실록은 효종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신가귀(효종의 어의)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고 했다. 그러나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피부에 있는 동맥과 정맥, 모세혈관)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했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상이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과 송시열과 송준길,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승지·사관과 여러 신하들도 뒤따라 들어갔지만, 상은 이미 승하했다.』 《효종실록:효종 10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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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申可貴)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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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신가귀(申可貴)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 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또는 효종의 병이 조선 왕실 대대로 유전되던 ‘농가진(膿痂疹)’이라는 악성 피부병이라는 설도 있다. 농가진의 균이 혈액을 타고 들어가 패혈증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결국 효종(孝宗)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효종이 죽었지만 그의 승하 이후에도 북벌의 사상적 이념은 조선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사대부들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했다. 또한 북벌의 논리는 중화 문화의 중심이 조선에 있다는 ‘소중화사상’, 나아가 ‘조선중화사상’으로 발전했다. 북벌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념과 명분이 조선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경제·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선진문물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조선은 북벌론이라는 명분에 얽매여 이런 창구를 스스로 닫아 버림으로써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어버렸다. 이후 북학(北學)사상이 만개하기까지는 꼬박 1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心機一轉),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사림의 지지를 상실해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렇듯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들의 공통점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이다. 그리고 결과는 대부분 신하의 승리로 끝난다. 과연 조선이 절대적 왕권으로 군림하던 전제왕권 시대라 할 수 있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